로라

소설 2024.10.27 댓글 큐널 블로그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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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는 8살 아이였다.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지만, 그 마을에서 유달리 총명했다. 이미 어린 시절부터 마을의 여러 사람들이 로라에게 여러 가지 고민 상담을 하러 몰려들었다. 로라는 사람들을 잘 관찰했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보면서 로라의 통찰력은 더 올라갔다.

로라는 다른 아이들이 입학하는 것보다 1년 빠르게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1년간 항상 A+를 받았다. 로라를 겉으로 볼 때는 그냥 평범하고 몸집이 작은 아이에 불과했지만, 로라의 눈을 볼 때면 이 아이가 총명한 아이라는 인상을 한눈에 느낄 수 있었다.

로라의 눈은 반짝거렸다. 예리한 눈에 큰 동공은 지식 그 이면의 무언가를 바라보는 힘이 있었다. 그것을 마을 사람들은 지혜라고 불렀다. 학교에서도 아이들은 로라를 괴롭히지 않았다. 선생의 편애를 받기도 했고, 로라가 마을 사람들 중에서 잘 사는 편에 속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본래 내 경험상 아주 뛰어난 아이는 다른 사람들이 건들지 않는다.

로라는 열심히 공부했다. 그것이 로라에게 있어서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물론 항상 즐거운 것은 아니었다. 공부를 해서 어떤 깨우침을 얻을 때는 아주 작은 조각의 즐거움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것은 마을의 다른 것들을 보고 듣고 느낀 것 이상으로 새로운 창을 로라에게 열어주었기 때문에 로라는 공부를 가장 즐겁게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로라가 2학년이 되었을 때 학교에 아주 이상한 아이 한 명이 들어왔다. 자기소개를 하라는 말에도 교탁 앞에 선채로 손에 민들레 꽃을 들고 만지작거리며, 땅바닥과 바깥을 연신 번갈아가며 바라보던 아이. 스스로 자기소개를 하지 않던 아이. 선생의 말에 따르면 이름이 헬렌이라고 한다.

로라는 그 이름이 아주 예쁘다고 생각했다. 로라는 헬렌이 앉은 책상을 그 후로도 자주 보게 됐다. 빗이란 건 한 번도 빗어본 적 없는 듯 엉킨 곱슬머리, 헤지고 더러워졌지만 연두색과 자주색 꽃무늬가 수놓아진 짧은 흰색드레스. 민들레 꽃을 항상 손에 하나씩 쥐고 다니는 게 눈에 퍽 띄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학교 내의 마을 아이들은 사실 대부분 남자아이들이었으며, 입고 있는 옷도 무채색이거나 여기저기 헝겊으로 기운 옷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로라는 항상 잘 세탁된 드레스를 입고 다녔다.

처음에 로라는 오지랖이 앞섰다. 저렇게 조용히 있으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우습게 볼 텐데. 결국 괴롭힘을 당하고 참다못해 저번달 학교에서 나간 낸시처럼 되고 말 거야. 그런데, 헬렌은 좀 달랐다. 아이들은 헬렌을 괴롭히지 않았다. 사실 처음에 조짐이 좀 있긴 했지만, 헬렌이 몇 번 사라졌다 나타나고 아이들에게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냥 괴롭히는 것을 그쳤던 것이다. 헬렌은 이 학교에 있으면서도 학교와 속하지 않은 사람인 것 같았다.

어느 순간부터 로라의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수업 시간의 대부분을 턱을 괸 채로 넋을 놓고 헬렌을 보고 있던 까닭이다. 로라 스스로도 놀랐다. 스스로 공부를 하거나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던 것을 제외하면 한 번도 관심을 가지고 뭔가를 오랫동안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라의 눈에는 이제 책이 들어오지 않았다. 검은 것은 글씨고, 흰 것은 배경에 불과했다. 어떻게 그동안 이런 걸 보고 있었던 건지.. 로라는 생각했다. 헬렌에 비하면 책은 생동감이 없고 너무 딱딱했다. 공부를 할 때에 오는 즐거움이 10개 중에 1개라면 헬렌을 보고 있을 때의 즐거움은 20개에 가깝게 느껴졌다. 그러니 공부를 할 이유가 없었다. 말했다시피 그동안 로라가 공부를 했던 것은 공부가 유일한 즐거움이었기 때문이었다.

헬렌의 뺨은 항상 홍조로 붉었다. 헬렌은 교실에서 자주 사라지곤 했는데, 그 때문에 교실보다 운동장에서 더 자주 보였다. 헬렌은 계속 땅을 보며 돌아다녔는데, 아마도 뭔가를 찾는 것 같았다. 로라는 헬렌이 뭘 찾는 것일지 항상 궁금했다. 그러다 오후 늦게 교실로 헬렌이 다시 들어올 때면 민들레 꽃을 들고 오는 것을 보고 깨달았다. 아, 헬렌은 민들레 꽃을 좋아하는구나. 그 꽃을 찾으러 항상 돌아다니는 거구나. 민들레 꽃의 노란색은 칙칙한 학교에서 유달리 눈에 띄었다. 헬렌처럼 민들레 꽃도 학교 내에서 유별난 것이었다.

로라는 헬렌이 사라질 때면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리곤 했는데, 집중은 되지 않았다. 책을 보려고 하면 할수록 헬렌과 그 민들레 꽃이 생각났다. 로라는 책을 볼수록 자신이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순전히 작은 즐거움만을 위해서 그동안 노력했을 뿐인데. 그 아이는 뭘 위해서 그렇게 그 꽃을 찾아다니는 걸까. 로라는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어떤 뭔가 알 수 없는 이유가 헬렌에게는 있을 것 같았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서 근 40년간 일한 늙은 할아버지 집사와 마차가 올 때면 로라는 거기에 탄 채로 노을을 보면서 헬렌을 계속 생각했다. 학교에 오기 시작한 이후로 7시에 일어나 학교로 올 때도 다시 집으로 돌아갈 때도 한 번도 타지 않았던 적이 없었던 마차. 매우 규칙적인 스케줄이었다. 학교에서도 시간표를 철저히 지킨 것처럼 집에 가서도 로라는 정해진 루틴대로 머리를 빗고 옷을 잠옷으로 갈아입은 후, 몸을 씻고 침대로 바로 누웠다.

하지만 잠을 못 이룬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헬렌이 자꾸 생각났다. 멀리서 일하고 있지만 온화한 아버지, 역시나 잘 만나지는 못하지만 항상 미안해하며 만날 때마다 늘 잘 놀아주고,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하는 어머니. 이 정도면 화목한 가정이고, 거기에 로라도 만족했기 때문에 한 번도 누구를 그리워하거나 생각하면서 잠 못 이룬 적이 없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말조차도 섞어보지 않고 그냥 멀리서 바라보기만 한 아이가 이렇게 계속 생각날 줄이야.

로라는 다음날 7시 13분에 일어났다. 평상시와 다르게 밤잠을 설쳐서 늦게 일어난 것이었다. 씻고, 옷을 갈아입었는데, 허겁지겁 갈아입느라 드레스의 일부가 찢어졌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로라는 마차에 빠르게 몸을 싣고는 학교로 갔다. 가는 도중에 2번째 수업에서 쓸 책을 챙기는 것을 까먹었다는 게 생각났지만, 이미 집에서 몇 십 km 정도 떨어진 후였다. 학교가 조금 멀었기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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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망인 하루였다. 앞서 말했듯이 로라는 책 한 권을 빼먹어서 야단을 맞았고, 오후 수업에서 까먹고 있었던 시험에서 성적은 B를 맴돌았다. 그저께 아버지가 편지로 성적이 떨어지는 것을 걱정하는 편지를 보내왔던 것이 생각나 로라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헬렌도 그날은 교실에도, 운동장 밖에도 보이지 않았다. 수업에 자주 빠지는 것은 그냥 늘상 있는 일이었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곧 나타나는 것도 마을 사람들의 소문에 의하면 예삿일이었기에 그렇게 걱정이 되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로라는 왠지 아쉽고 서운했다.

마지막 수업 전 쉬는 시간에 로라는 너무 지쳐서 모든 게 싫어졌다. 항상 쉬는 시간에는 다른 아이들이 다 나가 놀아도 교실에 앉아서 복습을 하던 로라는 책을 바닥에 던지고는 거의 처음으로 운동장으로 나갔다. 노을이 조금씩 지고 있었고, 몇몇 남자아이들은 공차기를 하고 있었다. 찢어진 드레스가 신경 쓰여서 조금 불편한 표정으로 구석 그늘진 곳에 서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수업을 시작하는 종이 울렸다.

로라는 들어가려고 하다가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갑자기 운동장을 달려서는 담장을 넘어서 저 먼 곳으로 사라졌다. 갑자기 왜 그러는지는 스스로도 잘은 몰랐지만, 그래도 그냥 그렇게 했다. 선생님과 아이들이 볼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안 하던 일을 하는 것이 약간은 마음이 무거웠지만, 동시에 왠지 모를 해방감도 느껴졌다.

학교가 점만 해 보일 만큼, 로라가 학교에서 보이지 않을 만큼 로라는 멀리 뛰었다. 로라는 언덕을 넘어 산으로 올라갔다. 그러다가 로라는 돌부리에 걸려서 아주 세게 넘어졌다. 그리고 그 앞에는 민들레 꽃이 하나 있었다. 로라는 무의식적으로 넘어져서 옷이 흙투성이가 되고 찢어졌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꽃을 꺾고 손에 쥐었다. 로라는 그걸 헬렌에게 가져다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헬렌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사뿐히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맨발인 것 같았다. 눈을 들어보니 헬렌이었다.

_헬렌..!

로라는 다친 몸을 일으키려고 억지로 움직였지만 어딘가 부러진 듯 아파서 움직일 수 없었다.

헬렌은 쭈그려 앉고는 로라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고, 로라는 꽉 쥐고 있던 민들레 꽃을 헬렌에게 주었다. 가까이서 본 헬렌의 얼굴은 정말 순수함 그 자체였다. 로라는 그 웃음이 너무 좋았다. 헬렌은 로라를 조심스럽게 일으킨 다음 양반다리를 하고 로라를 그 위에 눕힌 채 민들레 꽃과 로라를 번갈아 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로라는 행복했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집사와 마을 사람들이 로라와 헬렌을 찾아냈다. 로라는 다리가 골절된 상태였지만, 헬렌 앞에서 행복하게 웃으며 잠들어 있었다고 한다. 로라가 병원 신세를 몇 달간 진 이후 학교에 복귀했을 때 거기에서는 헬렌이 기다리고 있었고, 로라와 헬렌은 이제 어디에도 묶이지 않고 들로 산으로 민들레 꽃을 찾으며 함께 지냈다.

헬렌이 사라진 것은 그로부터 몇 달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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