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옷의 남자

카테고리 없음 2024.10.27 댓글 유니밧

_내가 들었는데 말이야. 그 외딴 성에 사는 남자는 피를 먹고 산다더군.

마을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하지만 헬렌에게는 그 이야기가 들리지 않았다. 헬렌의 관심사는 언제나 들판에 핀 노란색 민들레 꽃이었다.

어른들이 나가지 말라고, 그렇게 멀리까지 가진 말라고 주의를 줘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많아봐야 열댓 살 정도 될 아이는 바닥을 보며, 땅을 보며 걸었고 노란 민들레 꽃이 보일 때면 쭈그리고 앉아서는 그걸 꺾어서 오래도록 가만히 바라보았다.

헬렌은 마을에서 왕따였다. 늙은 아버지와 풀과 나무로 지은 방 한 칸이 있는 작은 집에서 살고 있긴 했지만, 아버지는 헬렌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버지의 관심사도 헬렌처럼 한 가지에 집중되어 있었다. 아버지의 관심은 개미에게로 가 있었다. 두 부녀는 그렇게 각자의 인생을 살았다. 헬렌도 딱히 아버지로부터의 사랑을 갈구하지 않았다.

헬렌은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걱정에 몇 번 교사가 가정 방문을 하기도 했지만, 헬렌의 아버지는 말을 웅얼거리다가 그냥 도로 방으로 들어가서 개미를 관찰하기 일쑤였다. 하루는 교사가 단정하게 차려입고 와서는 이건 무척 심각한 문제라고 말하자, 그러면 좋을 대로 하라고 하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헬렌은 몇 번 학교에 나왔지만, 공부나 아이들과 어울리는 데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느 무리에도 속하지 않았고, 그럴 이유도 없어 보였다. 헬렌의 관심사는 민들레 꽃이었으니까. 로라라는 헬렌보다 두어 살 정도 어린 친구가 이따금 아이를 따랐을 뿐이었다.

헬렌은 몇 번 붙잡혀와서 학교에 앉아 있는 시늉만 했을 뿐, 쉬는 시간이 되면 운동장에 나가 있다가 사라져버리기 일쑤였다. 그렇다 해도 노을이 질 때면 다시 마을 내에서 발견되곤 했으니, 처음엔 신경 쓰던 교사와 어른들도 그냥 그런 자유로운 아이에게 익숙해져 버렸다.

마을 아이들은 가끔 운동장에 헬렌이 땅을 보며 다닐 때마다 소리치며 놀리기도 했지만, 헬렌은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뭐라고 하는지 듣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몇몇 애들이 괴롭히기도 했지만, 헬렌이 큰 반응을 보이지 않고 민들레 꽃을 찾아 이내 어디론가 사라져버리자, 애들도 흥미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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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끝자락 산 위에 오래된 고성이 있었다. 아주 희한한 성으로, 알려지기로는 몇 백 년전에 돌로 쌓았음에도 이음매 하나 없이 매끈했으며, 아무리 상처를 내려고 해도 성은 잠깐 갈린 자국만 보일 뿐, 금세 어두운 검은색으로 돌아갔다. 지붕과 첨탑은 마치 박쥐가 날개를 접고 쉬고 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성은 산 정상에 있었는데, 성에 다다르기 전 정상에는 이상하게만치 뻥 뚫린 공터가 있었다. 나머지 산은 올라가는 길도, 성 바로 앞도 빽빽한 나무투성이였다.

그리고 짐작할 수 있다시피 헬렌은 어느 날 그곳에 다다랐다.

헬렌은 기뻤다. 그 공터에는 아무도 없어서 조용했고, 온통 노란 민들레 꽃과 잡초들로 가득했다. 흰색 민들레 꽃도 좀 있었지만, 그래도 헬렌은 그렇게 많은 민들레 꽃을 처음 보았다. 헬렌은 처음으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민들레 꽃을 찾던 것을 멈추고 그 풀밭에 드러누웠다.

헬렌이 선잠이 든 채로 노을이 졌다.

저 멀리에 그때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나타났다. 마을 사람들이 피를 먹고산다고 말하는 그 남자.

그가 헬렌에게 다가왔다. 헬렌은 누워서 눈을 감고 있었는데, 저 멀리 성에서부터 그가 걸어오고 있다는 걸 이미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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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너 나에게 네 피를 좀 보여줄 수 있겠니?

남자가 말했다. 목소리만 들렸는데, 젊은 목소리였다.

헬렌은 일어나서 그를 똑바로 보았다. 20살 남짓 되어 보이는 젊은 남자였다. 검은색 코트를 입고 뒤에는 검은색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피부는 새하얬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한 느낌이었다.

헬렌은 입고 있던 끄트머리가 해진 꽃무늬 드레스의 앞쪽, 아무렇게나 꿰매놓은 주머니에서 포크를 꺼내서 자기 손등을 마구 찔렀다. 붉은색 피가 새어 나왔다. 포크가 뭉뚝해서 여러 번 찔러야 겨우 약간의 피만 볼 수 있었다.

_아름답다.. 정말 아름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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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헬렌을 성으로 초대했다. 그 안에는 각양각색의 피가 전시되어 있었다. 그 색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남자는 말했다. 나는 드라큘라가 아니다. 나는 피의 색이, 그 살아있는 아름다움을 사랑할 뿐이지, 피를 먹음으로써 힘을 얻거나 생명을 유지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말했다.

헬렌은 끄덕였다. 피의 색도 아름다웠지만, 헬렌은 이제 다시 민들레 꽃이 보고 싶어졌다. 성 안에서는 바깥이 잘 보이지 않았고, 작은 창으로 공터가 얼핏 보이긴 했어도 이제 어두워져서 잘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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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이 잘 차려진 저녁을 먹고 한숨 잔 이후에 공터로 나갔을 때는 꽃들이 다 사라진 후였다. 헬렌은 실망하고 다시 마을로 내려갔다.

그런데 마을이 사라져 있었다. 학교도, 집도 선생도,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다. 집의 풀이 삭아 있었고, 뼈가 조금 나뒹굴었다.

헬렌은 조금 외로워져서 다시 성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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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이야기해 주었다.

자신은 다른 행성에서 이 성을 타고 어느 시점에 산으로 내려왔는데, 그것은 아무도 모를 시점이며,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아닌 언제나 언젠가라고. 그리고 헬렌이 보는 것 지금이 바로 그 언젠가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돌아갈 시점이 되면 언제나 알려달라는 말에 헬렌은 다시 한번 포크로 손등을 찍었고, 일어나서 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고는 학교로 갔다.

이제 마을 외곽에는 성이 없다.

대신에 재판정에 미치광이 살인자 한 명이 있을 뿐이다. 그는 그저 아름다움을 사랑했을 뿐이라고 하지만, 아무도 받아들여주지 않는다. 그날 밤, 판결이 완전히 나기 전에 그는 사라졌고, 마을에는 서서히 전염병이 돌기 시작한다. 헬렌은 판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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