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밀유출

카테고리 없음 2024.10.27 댓글 유니밧

소설 기밀유출 표지

중앙정보부 소속 요원 a는 지금 중앙 서버실에 들어와있다. 기밀 정보를 유출하기 위해서이다. 서버실은 어둡고 춥다. 기계가 윙윙 돌아가는 소리와 서버의 동작 여부를 알려주는 불빛들이 깜빡인다. 지금은 새벽 4시경. 경비원 두 명은 2시간 전 a와 술을 마시다가 곯아떨어졌다. a와 얼굴을 잘 알던 사이였던 덕이다. 처음엔 경계하더니 임무를 위해서 왔다고 하면서 상사를 몇 번 욕해주고 적당히 둘러대며 비닐봉지에서 술을 꺼내자 얼굴이 금방 풀어졌다. 아무리 보안이 철저한 시설이라고 해도, 다소 불필요해 보이는 임무는 항상 있기 마련이고, 말만 잘 하면 사람들은 금방 풀어진다. 특히 아는 사람의 힘은 강력하다. 사람을 설득할 때는 한 명보다는 두 명이 낫다. 한 명이 FM대로 해도, 다른 한 명은 서글서글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이 건물에 깨어있는 사람은 a 밖에 없다.

48시간 전, a에게는 한 가지 임무가 부여되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바로 보험료 고액 체납자 3명의 체납 사실을 중앙 서버에서 삭제하라는 것이었다. 현시점은 22세기. 세금은 사라졌지만, 의료 서비스 한정으로는 여전히 국가적인 보험이 운영되고 있다. 유전공학의 발달로 그동안 의료 기술은 비약적으로 향상되었고, 그 파급력과 위험성이 커서 국가에서 엄격하게 통제하며 관리하고 있다. 다만 국가에 원천기술은 없어, 이를 해외에서 라이센싱 받아서 사용하기 때문에 보험료는 꿈의 의료 기술을 적용받는 만큼 매우 비쌌다. 상위 0.1퍼센트의 부자들을 제외하면 다른 이들은 급여 거의 전부를 모아서 이 기술을 이용했다.

a는 처음에 이 임무를 받았을 때 매우 당황했다. 고액 체납자 3명은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알 큰 회사 회장의 아들들과 조카 한 명이었다. 어째서 이런 큰 회사의 자제들이 고액 체납자 명단에 올라 있으며, 또 이것을 왜 지워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IT 담당자로 중앙정보부에 들어와 FM대로 일을 처리하던 지난 5년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a는 즉각 항의했다. 하지만 상부의 입장은 변함이 없었다. 삭제하라.

a는 여전히 항의했다. 중앙 서버에 체납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맞으나, 이것은 복사본일 뿐이고, 보험료 관리 프로그램은 체인 구조로 동일한 정보가 서로 연결되어 구축된 시스템이기 때문에 절반 이상을 장악하지 않는 한, 체납 사실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다고 말이다. 더군다나 비상상황이 아니라면 시스템의 유지 보수가 아닌 데이터를 직접 조작할 수 있는 권한은 없다고 말이다. 그러나 상부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하라는 대로 하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보안을 이유로 기계로 만들어진 목소리긴 했지만, 강한 감정적 동요와 압박이 느껴졌다. a는 관리 패널에 접속하고는 놀랐다. 51퍼센트의 정보가 이미 장악된 상태라, 체납 정보를 원본 프로그램에서 조작하는 것이 가능한 상태였다. 상부는 기계 목소리로 하라는 대로 할 것이지 왜 말이 많냐고, 이미 원본 프로그램은 본인들이 다 조작해놨으니, 본인은 사본만 삭제하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국가적 최고 위기에 해당하는 코드를 패널에 띄우며 접속을 허가했다. a는 할 수 없이 48시간 삭제 기능을 누르고 패널에서 물러났다. 위기 상황에서는 상부의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것이 규정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비상식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조치였다. a는 규정으로 돌아가는 기관에서 일했다. 그리고 스스로도 평생 떳떳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할 만큼 규정을 철저하게 지켜왔다. a가 규정을 지켰던 것은 그것이 항상 옳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모두가 잘 살기 위해 지난 세기 인류 역사상 연구된 가장 최선의 방법이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상했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고작 3명의 체납 사실을 지우기 위해서 막대한 에너지가 드는 프로그램 장악과 국가적 위기에 해당하는 코드를 발행하는 것은 정말 이상했다. 규정을 지켜오던 지금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아니, 딱 한 번 잊고자 했던 그 일을 제외하고는. 다시금 a에게 그때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a는 패널 조작 건물을 나오다가 입구에서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다. 숨이 가쁘게 차오르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러나 a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이내 다시 정신을 차렸다.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고, 계획을 세웠다.

a는 범죄를 저지르기로 했다. 이번에 받은 임무가 기록된 일지와 체납 사실을 유출하기로 말이다. 이 임무는 당연히 기밀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아마도 여기에서 발을 뺐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 일어난 스케일을 봤을 때 이것은 결코 만만하게 볼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a는 여기에 맞서기로 했다. 만약 규정이 제대로 작동했다면 과거의 그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야 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 일 이후로 a는 더 열심히 규정을 지키며 살았지만, 결국 이런 일이 다시 생긴다면 더 이상 규정이 제대로 동작하지 않고 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a는 중앙 서버실에 들어온 것이다.

그때 철컥하는 문소리와 손전등 불빛이 a에게 비쳤다. b가 서버실로 들어왔다. 도대체 어떻게.. 이 시간대에 여기 올 사람은 a 밖에 없었다. 아니, 없어야만 했다. a는 무척 놀랐다. a..? b가 a를 알아봤다. 나야 a! a도 b의 목소리를 듣고 b가 누군지 알아차렸다. 둘은 서로 아는 사이였다. 그러나 b는 대체 어디서 어떻게 온 것일까. 하지만 그 의문은 빠르게 사라졌다. a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a는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을 받았다. b는 잠시 a를 보고 놀라는 듯하더니, 이내 태평하게 정말 오랜만이라고, 여긴 웬일이냐고 물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경계의 기색이 전혀 없는 서글서글한 말투. 서버를 분해하기까지 하다니. 범죄인데.. 라고 b가 말 끝을 흐리자, a는 b의 입을 황급히 막고는 단숨에 제압했다. b는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을 테니, 이거 좀 놓고 말하라고 간신히 말했다. a는 b를 제압한 손을 조금 느슨하게 했지만, 여전히 풀지는 않았다. b는 친구인데, 왜 이러냐고 했다. a는 친구라고? 하면서 네가 나를, 우리를 배신한 걸 내가 잊을 것 같냐고 말했다. a는 그날 네가.. 하고 말끝을 흐리다가 고개를 돌리고는 b의 결박을 풀었다. b는 아프다는 듯 입을 움찔대며 머리를 좌우로 왔다 갔다 했다. 됐어. 하고 a는 말하고는 대신 어디 가지 마. 너 같은 거 없애버리는 건 일도 아니라고, 허튼짓하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고는 다시 서버를 마저 해체했다.

b는 말했다. 예전이 그립다고. 나를 어떻게 하면 용서해 주겠냐고. a는 말없이 서버를 해체하고는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가져온 노트북과 해체한 서버 저장소를 연결해서 정보가 살아 있는 것을 확인했다. 둘은 이야기를 나눴다. 아니, 사실 b가 거의 일방적으로 말한 것에 가까웠다. b는 a가 뭘 하려는 건지 아는데, 포기하라고 말했다. 부질없는 짓이고 소용없는 짓이라고. a는 감정이 격해져서 노트북을 닫고는 서버를 해체할 때 서버 선반 위에 올려두었던 연결 부품들을 바닥에 던졌다. 네가 그때 다르게 행동했더라면, 그분이 그렇게 돌아가시진 않았을 거라고 말했다. b가 뭐라고 말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경보음이 울렸고, a는 도망을 재빨리 가져온 배낭에 노트북과 정보가 들어있는 분해한 서버 저장소를 넣었다. 하지만 a가 사전에 예상한 바와 다르게 문쪽으로는 경비원들이 아니라, 사형장이나 전쟁터에서 운영되는 사살 로봇이 기계음을 내며 등장했다. 둘은 로봇을 피해 미로같이 거대한 서버실을 헤맸다. 로봇에게 발각될 위기에 처했을 때 b는 미안했다고 말하면서 일부러 과잉행동을 하며 로봇에게 발각되었고 바로 즉결 사살되어 재가 된다.

타깃이 1개였기 때문에 생체 신호가 없는 것으로 보고 로봇은 물러났고, a는 기밀정보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과거 어느 시점, a와 b는 같은 고아원에서 자랐고, 원장이 되는 사람이 있었다. b는 고아원에서 따돌림을 당했다. a와 원장만이 유일한 b의 친구였다. 시간이 흘러서 b는 비공식 기관에 취업하고, a는 취업을 준비하면서 지내게 되는데, 고아원은 어느 순간 갑자기 b가 취업한 비공식 기관으로부터 찍혀서 들쑤셔지게 된다. 원장은 결국엔 규정대로 처리될 일이고 비공식 기관에서 흠을 발견했다 한들, 본인은 문제가 없기 때문에 괜찮다고 a와 모두를 안심시켰다. 이 문제는 결국 국가 심판대로 올라갔는데, 그때 b가 결정적으로 원장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고, 원장은 고아원 앞마당에서 비공식 기관에게 a와 b가 보는 앞에서 즉각 사살되었다.

b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는 공식 기관인 국가 상부에서 접근해왔기 때문이다. 비공식 기관은 사실 상부에서 더러운 일을 처리하기 위한 하청이었다. b는 고아원에서 왕따였고, 가족을 일부라도 기억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상부는 b와 만나서 b의 가족이 구금되어 있긴 하지만 살아있다는 걸 알렸고 면담의 기회도 준다. 면담에서 가족들은 b를 버린 게 아니라고, 평생 너를 기다려왔다고 말하고 미안하다고 말한다. 상부는 b가 주요 증언자로 협조하면 가족을 풀어주고 원장은 구금될 거라고 말한다. 고아원에서 외톨이였고 가족을 기억하고 있었으며, 평생 바라왔던 b는 그걸 거절하지 못하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하지만 b는 원장이 즉각 사살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b가 쓸모가 없어지자, 상부는 b 앞에서 가족 역시 사살해버렸다. 그렇게 b와 a는 갈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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