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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 2024.10.27 댓글 유니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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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아주 신기한 장치가 있다. 며칠 전 걸어가던 와중에 발에 뭔가가 걸려서 그것을 주웠다.
그것은 엄지 손톱만한 크기의 붉은색 버튼이 달린 손바닥만 한 작은 장치였다. 나는 어릴 때부터 바깥에 있는 걸 아무거나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다. 세상은 온갖 신기한 것들로 가득 찬 곳이었기 때문에..
아무튼 그래서 그 장치에 달리 조그마한 버튼을 여러 번 꾹꾹 눌렀는데,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나는 실망했다. 그래도 뭐 불이라도 들어오거나 소리라도 날 거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 장치를 주머니에 넣고는 집으로 갔다. 장치의 비밀을 알게 된 건 바로 다음날 오전이었다.

그날 오전은 조별 과제가 있는 날이었다.
같은 조 친구들은 항상 그렇듯 전부 탈주했고, 나 혼자서 과제를 다 준비하고 발표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시선 공포증이 있기 때문에 정말 발표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다른 건 다 내가 할 테니, 제발 발표만 다른 친구 한 명이 해줄 수 없겠냐고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아무도 답장을 하지 않았다.
발표를 내가 하지 않으면 단체로 낙제 처리가 될 상황.

할 수 없이 나는 발표 무대에 올랐다. 밤 새서 만든 슬라이드가 뒤로 올랐다. 온 몸이 덜덜 떨렸고 너무 무서웠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창밖을 흘깃 보니, 어느새 나를 제외하고 서로 친해진 다른 조원들이 나를 구경하고 있는 게 보였다. 다들 웃고 있었다. 내 좌우명은 '웬만하면 참고 넘어가자.'인데, 그 순간만큼은 정말 화가 났다. 나는 이렇게 힘들게 발표를 하고 하려고 노력하는데, 나를 그저 관망하면서 즐거워하는 꼴이라니. 나는 화가 난 채로 다음 슬라이드를 넘기려고 주머니에서 버튼을 꺼내서 세게 눌렀다.

그런데, 그 순간, 그 버튼이 효력을 발휘했다. 순간적으로 눈앞에 섬광이 반짝이더니, 모든 게 사라졌다. 나를 보며 웃던 다른 조원들도, 눈 앞의 다른 사람들도, 발표 하던 슬라이드와 공간 모두, 너무 찰나의 순간이라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나는 집에 있는 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슬라이드 버튼은 오른쪽, 전날 그 바닥에서 주운 버튼은 왼쪽에서 주웠는데, 왼쪽 버튼을 눌렀던 것이다.

휴대폰을 켜서 날짜를 확인해 보니, 반나절이 지나 있었다. 지금은 저녁이었고, 공포스러웠던 발표의 순간은 지나가 있었다. 그렇다면 학점은..? 앱을 켜서 확인해 봤는데, 학점도 내가 발표를 한 것으로 반영이 되어 있었다. 그렇다. 나는 시간을 앞으로 돌릴 수 있는 버튼을 주웠던 것이다.


+2

그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많은 것들을 넘기고 잊어버렸다. 몇 가지는 적어서 기억하기도 했지만, 다수의 것들은 잊어버렸다. 정말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적지 않았기도 했고, 귀찮아서 적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 들어서는 그 넘긴 순간이 잊혀지기 전에 적어놓으려고 노력중이다. 언젠가부터 나는 불안해졌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들이 늘어가면서다. 분명히 이유가 있었어서, 느끼고 싶지 않았어서 넘겼던 것이었을텐데도, 이상하게 불안하다.
뭔가 기억해내야 할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사는 듯한 느낌이다. 고통스러운 순간을 넘긴 것이지 그외에 중요한 다른 것들을 잊어버리진 않았을텐데, 왜 불안한 느낌이 드는지 모르겠다.

어떤 순간들을 넘길 때마다, '내가 정말 잊어도 되는걸까?',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점점 더 편집증적이고 디테일하게 글을 적고 또 적었다. 처음엔 넘긴 순간만을 이런 일도 있었긴 했지 하고 대략적으로 적은 후, 서랍 깊은 곳에 넣어두었었는데, 언젠가부터는 모든 순간을 그때그때 기록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밀리초까지의 시간, 날씨, 사람, 공간, 느낌, 한순간도 빼놓지 않고 적고자 했다. 하지만 그래도 점점 더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온통 지배했다. 분명 놓친 것은 없었는데.. 모든 일들을 빠짐없이 적었는데.. 나는 어떤 것을 잊어버린 걸 불안해하는걸까. 기록들을 다시 볼 때면 기억이 돌아오면서 마음이 편해졌다. 물론 대체로 고통스러운 기억이어서 다시 잊고 싶었고, 기록물을 다시 방치하면 금방 기억에서 잊혀졌다. 그런 일이 되풀이되었다. 오늘도 그 불안한 느낌이 극에 달했고, 나는 내가 과거에 썼던 기록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 일을 처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현타가 오기도 했지만,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너무 많은 것들을 빠짐없이 기록하는 바람에 책꽂이나 서랍장에 기록물들을 둘 곳이 없어서 조금 오래된 기록들은 상자 안에 넣어 한 곳에 쌓아뒀다. 누군가에게 쫓기듯 황급히 상자 안의 종이뭉터기를 뒤지다가, 그만 순간을 넘겨주는 장치가 주머니에서 떨어져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그리고 그때 장치의 뒷면에 무언가 조그마한 구멍이 있는 것을 처음 발견했다. 어떻게 뒷면을 볼 생각을 한번도 하지 못했던걸까. 그 구멍의 아래쪽에는 아주 작고 검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res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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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et'이라고 적힌 구멍을 보고 한참동안 생각에 잠겼다. 이건 잊었던 기억을 다 생각나게 해주는 구멍인걸까? 여기에 뾰족한 걸 집어넣고 누르면 저 기록물들을 보지 않아도 모든 게 다 떠오르는걸까? 잊어버렸던 기억들도 다 돌아오는걸까?

안그래도 좁은 방바닥에 어지러이 널부러진 종이와 노트들을 다시 모은다. 주말에 밤을 새가며 읽을 수 있는 것을 다 읽었다. 그리고 박스 안에 넣기 위해서 다시 포개고 있는데, 박스 아래 접히는 부분에 틈새에 끼어있는 종이 하나가 보인다. 종이를 꺼내서 보니 귀퉁이만 남아있는 종이였다. 아래쪽은 새까맣게 타 있다. 이건 무슨 기억이었을까. 다시금 불안한 느낌이 떠오른다.
다른 박스들 아래 틈새도 나 손가락을 넣어서 확인해 본다. 혹시 꺼내놓지 않은 종이조각이 있을까 싶어서.
하지만 그 조각 하나였다. 온전하지 않고 끄트머리가 타버린 조각도.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내가 계속해서 찾던 그 기억이 아니었을까? 그 조각에는 알아볼 수 있는 글씨가 적혀 있지 않았다. 하지만 뭔가를 썼던 흔적, 연필로 어떤 모음의 끄트머리 같은 자국이 살짝 남아있었다.

주말이어서 낮잠을 잤고 꿈을 꿨다.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하는데, 무슨 소린지는 알 수가 없었다. 이것이 꿈임을 자각했다. 그렇다면 이건 내 무의식이 만들어낸 무언가겠지. 그 장치가 무의식적으로 기억하는 것만큼은 잊게 하지 못하나보군. 이것은 내가 찾고 있는 기억일까, 아니면 그저 내 무의식이 만들어낸 허상일까, 어느 쪽이 되었든간에 그 목소리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누구의 목소린지는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잠에서 깼다.

일어나자마자 나는 서랍을 열어서 바늘을 꺼냈다. 물론 장치의 뒤쪽을 누를 생각이었다. 책상에는 그 끄트머리가 탄 종이 조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왼쪽으로 산더미처럼 쌓인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담은 상자가 보였다. 나는 망설였고 바늘을 다시 서랍에 넣고 생각했다. '그래, 어쩌면 별로 중요한 기억이 아니었을 수도 있잖아. 별 기억이 아닐지도. 지금 이렇게 홧김에 저 구멍에 바늘을 집어넣는 건 잘못 생각하고 있는거야. 또 장치를 다시는 쓸 수 없게 된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손해 아닌가?'

나는 다시 잠을 청했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았고 그날 밤잠을 설쳤다.


+4

미치겠다. 며칠째 잠을 못 자고 있다. 월요일이라 출근했다. 학교를 졸업한 것은 몇 년 전. 당연히 일이 손에 안 잡힌다. 눈치가 보여도 조금 일찍 퇴근해서 지하철을 타고 강다리 철교를 건너 있는 상담원에 들렀다. 사실 어렵지는 않았다. 그냥 그 순간을 넘기면 되니까. 모두가 그러려니 하고 그 순간을 잊어버릴 것이다.

상담사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닌 4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내 상황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물론 장치에 대한 비밀은 빼놓았다. 그것을 이야기하는 순간 아마도 또 다른 귀찮은 일들에 휘말릴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잊어버리고 살고 있는데, 그것이 괜찮을지를 물었다. 상담사가 하는 말은 이랬다. '우리 사람의 뇌는 기억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스템이 아니에요. 우리의 뇌는 살기 위해서 기억이고 생각하는 것을 이용하는 것 뿐이죠. 잊어버려도 괜찮아요. 항상 이렇다고 하진 않았죠? 그렇다면 괜찮을 거예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다리 위를 걸어서 왔다. 그 위의 인도를 걷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한강 다리를 사람들이 잘 걷지 않는 이유는 빠른 속도의 차가 다니는 길이 너무 넓고, 사람이 다니는 길이 좁아서라고 한다. 차가 다니는 길을 좁히면 자동차의 속도가 줄어들 것이고, 사람들이 다리 위를 많이 찾을 것이라고 어떤 건축가가 이야기 했던 것 같다. 나는 눈을 감은 채로 걸으면서 그렇게 바뀔 다리를 상상해 봤다. 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런 일은 현실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세상에는 무언가가 될 이유보다 되지 않을 이유가 훨씬 많다. 차가 빠르게 지나다니는 소리가 귓가를 계속 맴돌았다. 눈을 다시 뜨고 고개를 돌려보니 다리의 반쯤을 지나왔다. 석양이 지고 있었다. 강은 빛을 받아서 구리색 호일 같아 보였다. 문득 이 모든 것이 변하지 않을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잊힌 것은 잊힌 것일 뿐이고,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이 사실은 허상에 불과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내 손에 있는 그 장치의 버튼을 누르자, 나는 방에 누워 있었고 창밖은 늦은 밤이었다. 그리고 그 석양이 지던 순간과 그때의 생각들은 서서히 잊혔다. 내가 다시 그 순간을 여기에 적어, 다시 볼 때마다 살아 있게 만들 때까지는 말이다.

상담사에게 몇 번 더 찾아갔다. 나는 대체로 방어적이었다. 장치라는 중요한 사실을 빼놓고 이야기 하는데, 이야기에 진전이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그러다 쭉 생각하던 질문을 했다. 왼쪽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장치와 종이 귀퉁이를 매만지면서. 어떤 중요한 기억인 것인 것 같은데, 그것이 정확하게 뭔지는 모르고, 그것을 떠올리기 위해 다른 모든 고통스러운 일들을 다 다시 떠올리게 된다면 떠올리겠냐고 하자, 상담사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러지 않겠다고 말했다. 아마도 뭔가 잊어버렸다는 건, 또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일 거라고, 굳이 그것을 다시 떠올리기 위해 애쓸 필요는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잊고 산다고.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이 사람은 장치에 대한 건 절대로 모르겠지. 내가 인위적으로 기억을 지우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그렇다면 내가 그 중요한지도 모르겠다고 생각되는 사실을 장치를 통해 인위적으로 잊어버린 이유는 뭐지? 그저 장치를 썼을 뿐인데. 그럼 이 장치가 나에게 온 이유는 뭘까?'

돌아오는 길에 나는 또 다리를 건넜다. 이것이 이제는 습관으로 자리 잡았다. 나는 내가 스스로에게 내린 질문을 계속 걸으면서 생각했다. 생각을 시작했지만, 그 생각에 집중되지 않고 다시 다리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그렇다면 왜 이 다리가 이런 모습으로 존재할지, 왜 이상적인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는지를 생각했다. 거기엔 사실 거창한 이유가 있지 않았다. 차가 원활하게 지나다니기 위해서. 그저 강이 있었고, 거기를 많은 자동차들이 건너게 하기 위해서. 미국과 같이 자동차 중심의 나라로 도로를 설계했기 때문에. 변하는 것은 또 다른 부스럼을 만드니까. 귀찮으니까.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 역시 아무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내가 이 모든 것을 만들어내고 또 싸우는 것은 어쩌면 중요한 것은 내가 이 장치를 쓰기로 결정했다는 그 사실일 뿐. 방법이 다를 뿐이지 결국 잊고자 결심한 것은 나 역시 남들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그냥 나는 이렇게 살고자 한 게 아니었을까. 그리고 나는 그 순간을 잊고 다시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종이를 강 위로 던졌다. 그리고 다음에는 장치를 강 위로 던졌다. 장치가 있으면 시간을 넘길 수 있기 때문에 분명 유용한 일에 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을 넘기면 과거의 기억을 다시 불러오고자 하는 딜레마에 빠질 것이고, 이 이상한 장치에 대한 비밀을 나 혼자 가지고 있으며 계속해서 괴로워할 것이다. 그래서 그 장치를 던졌다. 내가 자유로워지기를 바랄 뿐이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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