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앤서니

카테고리 없음 2024.10.27 댓글 유니밧

소설 칼 앤서니 표지

1

"나는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좋습니다."

레아가 불 켜진 철탑에 가까이 가서 구경하자고 말하자, 칼은 이렇게 대답했다. 둘은 호텔의 창문 앞에 선채로 밖을 바라보고 있고, 방에는 은은한 조명에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흐른다.

아리에테는 서쪽 국가 중 예술적으로 가장 유명한 나라의 수도다. 철탑은 이 도시의 대표적 랜드마크로, 해마다 수많은 관광객이 이곳을 찾아온다.

레아 아셀리아도 그중 한 명이었다.

아리에테로 오기 일주일 전, 레아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급하게 여행을 떠난 것은 그로부터 시작된 불안을 감추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막대한 재산을 가진 레아의 어머니는 본가에서 300km 정도 떨어진 작은 시골집에 레아와 유모를 남겨두고는, 집에서, 혹은 온 나라를 떠돌아다니며 파티를 열었다.

어머니는 잘 손질된 금발 머리를 휘날리며, 파티의 주인공으로 홀의 한복판에 등장했다. 사람들은 앞에서는 레아의 어머니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뒤에서는 이상한 여자라고 수군거렸다.

레아는 어릴 때는 그래도 파티에 종종 초대받곤 했는데, 그럴 때면 레아는 거기 온 다른 상류층 사람들의 귀여움을 한몫에 받곤 했다.

어머니에게 레아는 잠시 손님들에게 소개할 때를 제외하도는 언제나 뒷전이었다. 한번은 레아가 정원에 있는 연못에 빠져서 죽을 뻔 해서 하인들이 그 사실을 알려줬는데도, 전혀 신경도 안 썼다.

그래도 파티가 끝나고 나면 레아는 반쯤 취한 어머니의 무릎에 앉은채로, 이런저런 얘기를 듣곤 했다.

하지만 레아의 나이가 13살이 넘어가자, 더이상 아이의 귀여움이 레아에게 남아 있을리 없었고, 이후로 파티에 가면 참가자들은 어엿이 자라난 레아를 눈엣가시로 여길 뿐이었다.

어머니도 레아를 더는 부르지 않았다. 어머니가 레아를 불렀던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더 돋보이기 위해서였다. 레아는 시골집에서 살면서 종종 파티에 초대받았었던 때를 떠올렸다.

사람들은 파티에 저마다 목적이 있어서 왔다. 팔려고, 혹은 다른 이를 사려고 온 것이 대부분이었다.

순수히 이걸 즐긴 사람은 아마도 레아의 어머니밖에 없었을거다. 어머니는 주최자였고,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을테니까.

어머니는 어느 길가 한복판에서 술에 취한채로 웃다가 죽었다.

어머니가 죽자마자, 유모는 그만뒀다. 그래도 레아는 한때 유모가 자신을 사랑하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유모는 레아를 제법 엄격하지만 살뜰하게 챙겼으니까. 하지만 사망 전보가 전해지자마자, 유모는 화려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옷가지를 트렁크에 싣고 택시를 불러서 사라져버렸다.

인사도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다닥 떠나버린 걸 보면 레아에게 딱히 애정이 있지도 않은 것이었다. (나중에 듣고 보니까 단순히 돈 때문에 유모로 있었던 건 아니고 무슨 약점이 잡혔었다던가 그런 것이었다.)

레아에게 남겨진 것은 막대한 재산, 그리고 어머니의 변호사 한 명이었다. 아니, 변호사는 제외해야겠다. 상속 절차를 끝낸 후, 스스로가 매달 전속 계약으로 받았던 금액을 제시했을 때, 레아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아무말도 못하자 또 사라져버렸으니까.

다행스럽게도 레아는 책을 좀 읽어서 세상에 대한 지식이 아예 전무하지는 않았고 재산을 안전한 곳에 분배해둔 다음, 거기에서 10% 가량을 때서 여행을 가기로 했다. 살던 시골집과, 어머니의 집도 다 처분했다.

그리고 레아는 비행기에서 칼을 만났다.
칼은 좋은 사람이었다.
그의 신사적이고 자비로운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칼은 옷을 깔끔하고 격식있게 입었고
표정이 조금 무뚝뚝했지만, 하는 말을 들어보면 마음이 따듯한 사람인 것 같았다.
딱히 재산을 노리는 사람 같지도 않았다. (얘기하다보니, 할아버지가 광산업자였다고 했다.)

하지만 사실 레아는 그게 누구라도 일단 따라가고 기대려고 했을 것이다. 레아는 사랑이 필요했다.

칼은 지금 아리에테로 아버지의 사업을 배우러가는 중이라고 했다.

레아는 칼과 친해지고 싶어서 많은 이야기를 했다. 주로 책에서 읽은 것들이 다였지만 말이다. 그래도 칼은 예의 바른 사람인지라 레아가 하는 말을 흥미롭게 들어줬다.

아리에테에 도착했을 때, 레아는 칼이 다니는 곳을 졸졸 따라다녔다. 호텔로, 거리로, 사람들 사이로, 칼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칼도 그다지 싫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리에테는 우중충한 도시였다. 도착한 날 비가 왔고, 늘 날씨가 흐렸다.

칼은 매번 혼자 다닌다고 했다. 자신의 친구들은 그래도 수행원을 한 명씩 대동하기도 한다는데, 본인은 교육 방침에 따라 여행 다닐 때는 혼자서 모든 걸 처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칼은 레아를 신기하게 바라봤다. 다수의 사람들이 본인에게 접근하는 일이 잘 없기 때문이란다.
레아는 아마도 칼의 얼굴이 전반적으로 항상 굳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칼은 주로 인사를 하러 다녔다. 그리고 이때만큼은 표정이 아주 부드럽게 풀어졌다.
파리의 지역 상점들에 있는 점포 주인들과 칼은 서로 아주 잘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
칼은 간단하게 가게에 들러서는 안부를 묻고, 어떤 것이 잘 팔리는지 같은 걸 간략하게 물어보고 가게를 떠났다.
대략 한 가게에 30분 이상을 머무는 경우가 드물었다.

칼은 또 파리와 살짝 떨어진 곳에 있는 공장에도 종종 방문했다. 역시나 하는 일들은 대체로 인사치레였다.

그렇게 여기저기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묻는 일이 끝나고 나면 칼은 이제 호텔로 돌아가서는, 자신이 그날 다녀온 곳에 대한 노트를 정리하고는 침대에 누워서 쉬었다.

칼이 한 모든 행동들을 레아가 직접 본 것은 아니고, 그냥 그랬다는 걸 칼에게서 저녁 시간에 들어서 안 것이다.

레아는 칼을 따라서 같은 호텔에 묵었고, 낮에는 칼을 자주 따라다녔지만, 그마저도 지칠 때는 호텔에 혼자 남아 있다가 저녁 시간 때쯤에 칼을 다시 만나곤 했다.

가끔 칼의 일이 평소보다 일찍 끝나곤 했는데, 그럴 때면 칼은 호텔에 일찍 들어와서 로비에서 레아를 불러내기도 했고, 그럴 때면 둘은 함께 거리 카페테리아에 앉아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거나 공원을 산책하거나 공연을 관람하곤 했다.

그렇게 3개월이 흘렀다. 레아는 칼에게 더더욱 빠져들었다. 칼에게서는 어쩐지 오래 알았던 듯 친근하고 익숙하고 편안한 느낌이 있었다.

칼은 거의 규칙적인 생활을 했고, 무언가 상당한 안정감을 가지고 있었다.
새벽 일찍 나가서, 도서관에 갔고, 앞서 말한 일정들을 소화하고는, 오후나 저녁에 돌아와서는 꼭 저녁을 호텔에서 먹었다. 그리고 밤에는 항상 보통 사람들보다 2, 3시간은 이르게 잠들었다.
지친 기색이 별로 없었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다는 듯 상당히 단호하고 묵묵하게 해야할 일들을 해나갔다.

하지만 사실 레아는 칼에 대해 아는 게 여전히 별로 없었다.
사실 칼은 별로 말수가 없었고, 말을 해도 했던 말을 또 할 때가 많았다.
오후에 만날 때는 아직 일기운이라고 해야될까 그런 것이 덜 떨어졌는지, 말이 더 없고 뭔가 머릿속으로 여러 생각을 많이 하는 듯 했다.

다른 시간보다 저녁 식사 시간에 만날 때에야 그나마 제대로 된 말을 했다.
근데 그 말들도 사실 대부분 일과 관련된 말이었다.
레아는 칼에게서 어떤 벽을 느꼈다.

어느 날 저녁 식사 시간에 레아는 칼에게 물었다.

"칼. 우리 좀 더 가까워져요. 지금까지 같이 어울린지가 세 달이 넘었는데, 난 아직도 당신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네요. 나는 내가 살아온 인생을 전부 이야기 했는데, 당신은 주로 일 얘기잖아요.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좀 말해줘요."

"별로 듣고 싶지 않을 거예요. 레아.
내 인생은 재미가 없거든요.
그것보다 오늘 중심가의 상점 아저씨가 했던 말을 전해줄게요.
그 아저씨는 우리 아빠랑 아주 오래 알던 분이신데.."

"칼. 우리 좀 더 진지한 얘길 해볼 수 없을까요? 아니면 혹시 장소가 문제일까요?"

"레아.. 장소는.."

"좋아요. 그럼 우리 저 철탑에 한번 올라가봐요. 다른 사람들처럼, 불이 환하게 밝혀진 저 철탑을 보고, 또 올라가도 보면서 밤에도 한번 이곳저곳을 돌아다녀보자고요. 그림도 남기고, 즐겁게 웃고 또.."

"레아.."

"그럼 30분 있다가 로비에서 봐요!"

"레아!"

"네?"

"장소가 문제가 아니예요.. 그래도 나랑 좀 더 얘기하고 싶다면 내 방으로 오후 10시까지 와줘요. 512호예요."

"하지만 레아.. 이걸 알아줘요."

"나는 조금 멀리서 보는 걸 좋아한다는걸요."

레아는 사실 칼의 방에 가본 적이 없었다.
아니 방의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었다.
칼은 항상 식사가 끝나고 나면 방으로 올라간다고 했다.
그러고는 다른 때만큼은 자신과 동행해도 괜찮지만, 자기 방으로 갈 때만큼은 절대로 따라오지 말아달라고 했다.

이유가 왜냐고 물어도 얼버무리곤 해서, 레아는 두어번 정도 물어보다가 말았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레아는 칼의 방으로 초대받았다.
레아의 마음이 들떴다.

저녁 식사 시간은 늘 그렇듯 오후 5시 반에서 7시였고 레아가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고 단장을 마친 것은 오후 8시였다. 시간은 정말 느리게 흘러갔다.
레아는 손목에 작은 시계를 차고는 초바늘이 흘러가는 것을 바라봤다.

눈꺼풀이 살짝 무거워졌다. 아리에테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밤늦게까지 밤을 꼬박 새면서 책을 읽기도 했는데, 칼을 따라다니면서부터는 바른 생활이 몸에 베인 듯 했다.


2

눈을 다시 떠보니 시계가 오후 9시 5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헉..!

레아는 빠르게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머리를 정리한 다음, 문 밖으로 뛰쳐나간 후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몇 층으로 갈까요..?"

"5층이요!"

"알겠습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채 다 열리기도 전에 레아는 다급하게 뛰쳐나갔다. 입고 있던 드레스의 끝자락이 엘리베이터 문에 걸려서 살짝 찢어졌다.

레아는 방문에 붙은 호수 명패를 확인하며 빠르게 달렸다.
바닥은 붉은색의 카펫으로 되어 있었고, 벽은 고풍스러운 대리석이었다.

504.. 509.. 511..

그런데, 511호를 보고 모퉁이를 튼 순간, 거기엔 몇 발작 안 가자마자 벽이 있었다. 레아는 워낙에 빨리 달리느라, 벽에 곧바로 부딪힐 뻔 했다.

그리고 그 옆의 문은 '직원전용 공간.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고 되어 있었다. 혹시나 해서 반대쪽 복도로도 뛰어가봤지만, 7층의 객실은 501호에서 511호까지가 끝이었다.

설마 직원전용 공간에..? 하고 둥근 문고리를 돌려봤지만, 잠겨있었다.

이게 무슨 일일까. 늦지 않으려고 뛰어오느라 레아의 숨은 가쁘게 쉬어졌고, 더운 한여름 날씨에 땀이 나서 머리가 이마에 엉겨붙고, 드레스는 찢어졌다. 기분이 엉망이었다.

"칼은 그렇다면 어디 있는걸까..? 지금이라도 모든 방을 돌면서 초인종을 누르고, 그래도 없으면 직원전용 공간 문을 부숴볼까..?"

레아는 그러다 순간적으로 본인이 이성을 잃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침착해지기로 했다.

칼은 종종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하기도 했어. 이번에 이것 역시 수수께끼일지도 몰라. 그렇다면 내가 답을 찾아내길 바라는거야.

일단 레아는 한숨을 돌린 후,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서는 로비의 카운터에서 지배인에게 512호가 어디에 있는지를 물었다.

"512호요..? 저희 호텔은 511호까지밖에 없습니다만.."

지배인이 얼굴에 약간의 장난기 있는 웃음을 지닌채로 물었다.

"그렇다면 501호에서 511호 사이에 묵고 있는 분 중에 '칼 앤서니'라는 이름이 있나요?"

지배인은 약간 의아한 얼굴로 레아에게 되물었다.

"호텔 손님에 대한 정보는 개인적인 사항이라 알려드릴 수가 없습니다만, 그런 건 왜 물으시는거죠?"

"그렇다면 511호 안쪽의 직원 공간을 혹시 들어가봐도 될까요?"

"거긴 폐창고예요. 박스 말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배인은 이제 의심의 눈초리로 레아를 쳐다보았다.

"제가 아는 누군가가 거기서 저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 사람을 사랑하나요?"

지배인이 물었다.

"네!"

"그 사람도 당신을 사랑하나요?"

"...네."

레아는 조금 자신 없게 이야기했다.

그제서야 지배인은 경계를 풀고는 웃음을 지으며 많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기꺼이 열어드리죠. 사랑은 때로는 미친짓이니까요. 하하. 아이고.. 하도 워낙에 요즘은 특이한 손님들이 많으셔서 말이죠. 숨바꼭질하는 것도 아니고.. 그 분은 대체 거긴 어떻게 들어가셨담.. 재주도 좋으셔.. 저번에도 말이죠 어떤 금발의 아가씨가 여길 찾아오셨는데 글쎄.."

"잠깐만요. 저는 지금 그 문이 급해요. 이야기는 나중에 패주시고 어서 열쇠를 주세요. 혹시 같이 가야 하는 건 아니겠죠? 혼자 가고 싶은데요."

"원하시면 혼자 가셔도 좋습니다. 위험하진 않을거예요. 저희 호텔은 최고의 경비를 자랑하니까요. 5층은 더군다나 더 높으신 분들이 머무시는 편인지라, 아무나 들어갈 수 없게끔 경비를 더 철저히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무슨 일이 있으실 경우를 대비해 비상계단에 경비를 대비시켜 놓겠습니다."

지배인은 웃음을 지으면서 벽면에서 열쇠 하나를 가져와서는 손가락에 넣고 휘휘 돌렸고, 레아는 열쇠를 낚아채서는 다시 5층으로 올라갔다.

레아는 이번에는 조금 천천히 걸었다. 약속 시간은 어차피 벌써 15분이나 늦었다.


3

레아는 숨을 한번 들이쉬고는 둥근 손잡이 중간에 열쇠를 넣고 돌렸다. 손잡이는 둔탁하게 돌아갔다.

문이 열리자, 박스가 양옆으로 쌓인 깊고 미로 같은 공간이 등장했다. 상자가 여기저기 쌓여있었고, 밖에서 보는 것보다 안에서 보는 게 훨씬 넓었다. 밖에서는 안에 이렇게 넓은 공간이 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구불구불한 공간을 레아는 걷고 또 걸었다. 공간은 점점 더 좁아졌다. 나중에는 몸을 옆으로 하고 걸어야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레아는 포기할 수 없었다. 저쪽에서 불빛이 보였고, 저쪽에 칼이 있을 것만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몸이 짓이겨질 정도로 좁은 상자 사이를 통과하자, 거기에 엄청나게 넓은 홀 하나가 등장했다.
어릴 적 어머니의 파티가 열렸었던 집의 홀만큼 넓은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기다란 단 하나의 창문 아래의 의자에 칼이 몸을 앞으로 숙인채로 고민에 빠진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아, 레아. 나를 찾아냈군요."

레아는 너무 지쳐서 뭐라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미안해요.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죠."

레아는 칼에게로 달려갔고, 칼은 일어나서 레아를 안았다.

창밖으로는 달빛이 비치고 있었다.

"여기 밤하늘은 참 아름답죠. 이런 밤이면 불이 다 꺼져서 하늘이 잘 보여요."

레아는 숨을 돌린 후 질문을 던지려고 했다.

하지만 칼은 입에 손을 대고 잠시 조용히 하자는 표시를 했다.

"우리 잠깐 이 조용한 시간을 좀 즐겨봐요. 아직 당신은 급해요. 조금만 더 있어봐요."

칼은 미소를 띈 채로 창 밖을 바라봤다. 10여분쯤 지났을까. 레아에게는 하루와도 같았던 시간이었다. 레아는 지금이 타이밍이겠거니 하고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당신은 누구죠?"

"저는 칼 앤서니예요."

"아뇨, 그런 거 말고요. 진짜 당신은 뭐하는 사람이예요? 나를 이런 곳까지 불러오기나 하고, 진짜 당신을 알려주세요."

"...별로 듣고 싶지 않을텐데요."

레아는 이제 화가 났다.

"제가 듣고 싶지 않다고요? 듣고 싶어한다고 아까 식사 시간부터 그렇게 말했고 그걸 들으려고 여기까지 온 거잖아요! 나를 무시하는건가요?"

"아니예요.. 레아.. 그저.."

"그저?"

"그저.. 내가 하는 얘길 들으면 많이 실망하게 될 것 같아서. 그리고 나를 싫어하게 될 것 같아서요.."

"그럴리가 없어요. 얘기해줘요."

"그래요.. 레아.."

"난.. 유령이예요. 레아. 당신이 만들어낸 상상 속의 인물이죠. 저는 당신의 환상이자, 꿈이예요."

"당신이 나를 원하고 간절히 찾는 그 마음이 나를 만들어냈어요. 당신만이 볼 수 있는 나를요."

"당신이 어릴 적 본 책에서, 당신이 그토록 원하고 바라던 사람의 모습이 나를 만들어낸 거예요."

"당신은 지금 꿈을 꾸고 있어요. 난 당신이 꿈을 꿀 때만 만날 수 있는 존재랍니다."

"그리고 제 이름, 사실 제 진짜 존재는 바로.."

그때 어디에선가 11시를 알리는 시계 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다 됐군요. 다시 돌아가면 일어나서 호텔 지배인에게 다시 물어보세요. 512호가 존재하는지, 그리고 호텔 사람 중에 제 이름이 있는지를요. 저는 꿈의 존재예요."

"그건 말도 안돼요! 그럼 지난 3개월간 제가 본 말을 건 상대는 누구죠? 비행기에 본 사람은요? 그것도 꿈인가요?"

"그럼 대체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거죠?"

"아마 병원에 가봐야 할거예요 레아. 아직 이별에 대한 아픔이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어요. 또다른 이별을 경험하게 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이렇게 만져지는데.. 그리고 목소리도 들리는데..
거짓말이죠.."

"미안해요 레아.. 아마도 오늘이 마지막일 거예요. 그동안은 좋은 꿈을 꿨다고 생각해줘요. 그럼 좋은 하루 보내세요."

그리고 칼은 레아의 이마에 입을 맞췄고, 칼과, 밤하늘, 그 공간은 물이 어떤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4

레아는 눈을 떴다.
시계가 손목에 있었고, 시계는 오후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레아는 부리나케 달려서 로비로 갔다.

"오늘이 며칠이죠?"

"1960년 7월 28일 금요일입니다.
도와드릴 일이라도..?"

:꼭대기층의 직원 창고 열쇠 주세요!"

"그 열쇠는 왜..:

"제발 어서요!"

레아는 열쇠를 받아들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5층 가주세요!"

"죄송하지만 손님.. 저희 호텔은 4층까지밖에 가실 수 없습니다. 더 올라가보실 수도 있지만 위험해서.."

레아는 멋대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내리자마자 수리중이라는 팻말로 앞이 막혀 있었고 천장과 바닥은 온통 너저분한채로 있을 뿐이었다.

위험하다고 만류하는 엘리베이터 지배인을 두고 레아는 직원용 공간의 열쇠를 넣고 돌렸다.

열자마자 모레먼지가 뿜어져 나왔고 레아는 기침을 했다. 그리고 그곳은 상자로 입구부터가 막혀 있었다. 상자는 수십년을 쌓여 있었던듯 입구를 완전히 가로 막고 있었다.

레아는 엘리베이터 지배인을 불러, 상자를 치워봤다.
하지만 안쪽 공간은 겨우 박스 서너 개 정도가 더 들어 있을 뿐이었고, 그 안에는 그냥 벽이 있었다.

"여기에.. 분명히 공간이 있었는데.."

"손님.. 어떻게 여기 그런 공간이 있겠어요!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건물 구조상 여기에 그렇게 깊숙한 곳이 있을 순 없어요."

"그럼.. 정말 꿈인거였을까.."

레아는 호텔 지배인에게도 다시한번 물어봤다. 그 이름이 있느냐고. 그의 생김새도 묘사해봤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없다는 대답이 돌아올 뿐이었다.

레아는 바깥 바람을 쐬려고, 호텔 밖으로 나왔다. 동네가 온통 어둑어둑했다.

레아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있다가 잠들었다.


5

레아는 호텔 지배인에 권유로 로비에 돌아왔다. 그리고 로비의 소파에서 다시 잠들었다.

옆에 앉아 있던 어떤 시끄러운 부인의 소리에 잠을 깼다.

"글쎄 그거 아세요? 여기 이 호텔 소개 브로슈어에 적혀 있는데, 30년 전에는 이 맞은편에 이 호텔과 똑같은 모양이 호텔이 지어져 있었대요. 쌍둥이 호텔이라고 불렸다는군요. 방향이나 모든 게 다 똑같았는데, 전쟁으로 그만 폭격을 당했다는군요."

레아는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철탑은 푸른색 조명으로 빛났다. 지난밤 봤던 철탑의 불빛과 달랐다. 왜 진작 알아채지 못했던걸까.
레아는 깨달았다. 이곳은 같은 공간도 아니었으며, 같은 시간도 아니었다는 것을.


이곳 아리에테에는 유명한 게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철근 구조물, 그리고 하나는 호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잠을 자는 여자 한 명.

그 여자는 자신이 어떤 호텔에서 잠을 자는 것을 통해 과거로 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상한 여자였다.

레아는 그후로 5년간 여러 호텔에서 잠을 청하며, 과거로 가보려고 했다. 하지만, 항상 어떤 꿈도 꾸지 않고 꿀잠을 잤다.

칼 앤서니에 대한 기억은 점차 흐릿해졌다.

레아는 지나다니다 종종 거리에서, 광장에서 그의 뒷모습을 보곤 했다. 하지만 뒷모습이 비슷한 사람은 많았다. 잡고 보면 전혀 다른 사람이었으니까.

처음에 레아는 그저 칼이 자기를 놀리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그를 호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찾아다녔다. 혹시 같은 호텔이 어디 있는 게 아닐까. 사실 본인은 약을 먹고 다른 호텔에서 잤던 게 아닐까 하고.

레아는 돈을 거의 다 탕진했다. 호텔 이곳저곳에 머무르며 모르는 사람이 없어졌고, 소소하게 친구 몇 명을 만들면서 공연도 보고 그림도 그리고 글도 썼다. 하지만 호텔에 머무는 사람들은 금방 아리에테를 떠났고, 레아는 그럴수록 더더욱 칼이 다시 보고 싶어질 뿐이었다. 몇 년이 흘러, 칼의 얼굴이 흐릿해졌을무렵, 레아는 결국 그가 꿈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레아는 처음으로 길거리에서 단잠에 빠져들었다. 과거로 가기 위해 긴장하고 잠드는 잠이 아니라.

그리고 레아는 꿈을 꿨다.

일어나보니, 침대 위였다.

"잘 잤나요?"

칼이었다. 거의 잊어버렸던 얼굴. 이제는 봐도 별 느낌도 안 들었다. 그냥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느낌. 레아는 칼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호텔의 차창으로는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레아가 칼과 함께 지내던 바로 그 호텔이었다. 나른한 오후였다.

"어디 있었던 거예요? 당신이 있었던 곳에 갔을 때 사방이 벽으로 막혀 있었어요. 그렇다는 건 지금도 나는 꿈 속에 있다는 거겠죠?"

"그래요."

"잘 지냈나요? 당신이 내가 만들어낸 사람이라고 했죠? 그람 말해봐요. (내가 나 스스로에게 말을 걸고 있는거네요.) 당신은 정말 누구였죠? 당신이 마지막 말을 남기고 시간이 다 됐다고 하고 간 이후로 아무리 생각해봐도 당신의 다른 부분들은 내가 어디서 가져왔는지 다 떠올렸지만, 오직 당신의 얼굴과 이름은 내가 어디에서 보고 떠올렸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어요."

"그렇군요.."

"진실을 알려줄게요. 눈을 감아봐요. 내가 누구인진 당신의 꿈인만큼 당신이 알고 있어요.""

"당신은.. 내 아버지군요.. 어쩜 그럴 수가.."

"그래요."

레아는 이제서야 모든 것을 기억했다. 파티가 끝나고 나면 어머니가 레아를 언제나 무릎에 앉히고 해주던 이야기. 너무 큰 슬픔에 잊어버리고 있던 추억이었다. 레아는 어머니를 사랑했다.

"너희 아버지는 신사셨단다. 우리는 아리에테에서 만났어. 나는 여행을 가던 차였고, 우린 같은 호텔에서 머물렀어. 재밌었던 건, 종종 그가 직원용 공간에 숨어서 나를 놀래켜주기도 했다는거지.. 하지만.. 그는 사라져버렸어."

"7월에 넓은 홀에서 열릴 파티에서 만나서 춤 추기로 했는데.. 그랬는데.. 오늘도 오지 않았네..."

그러면서 어머니는 집안이 떠나가게 웃곤 했다.

"왜 엄마를 떠난건가요?"

"레아, 그건 내가 답해 줄 수 없단다. 나는 네가 만든 꿈인 걸.."

"내 모습도 네 상상에 불과하잖니. 네가 들은 모습으로 구성된.."

"그래도 이유가 있었겠죠..? 아무 이유 없이 그냥 간 건 아닐거잖아요."

"아마도.. 그렇겠지. 그래도 아마 죽었을거야."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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