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그

카테고리 없음 2024.10.26 댓글 유니밧

1

하람.

왜?

여기 이 나무를 보면 무슨 생각이 들어?

글쎄? 나무가 정말 키가 크고.. 잎이 푸른 게 뭐 풍성하니 보기 좋다?

그렇지?
나는 언젠가 이 나무처럼 큰 사람이 될 거야.
큰 사람이 되어서는, 이 세상에 잎들을 흩날리며 내 족적을 알릴 거야.
사람들은 모두 나를 우러러보게 될 거라고.
바로 이 나무처럼.

메그는 우리가 종종 함께 앉아서 보는 공원 가장자리의 커다란 나무를 볼 때면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녀는 항상 어떤 범접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을 꿈꿨다.
이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도 높이 오를 것이라고.
적어도 자신이 타고난 재능의 분야에서는 반드시 최고가 되고 말 것이라고
그렇게 호언장담했다.

나는 그런 메그를 좋아했다.
또 나는 메그가 분명히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책에서 본 실제 성공하는 사람들의 공통점들이 있는데
그 기준에 메그는 모두 부합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야망이 매우 컸으며 계획적이었고 또 자신만의 확실한 목표가 있었다.
그것은 다른 이들이 함부로 이래라저래라 하거나 부술 수 없는 어떤 원대한 무언가였다.
그녀는 그 자신이 가진 이 원대한 무언가를 제외한 다른 일들도 싹싹하게 착착 해낸 후에
사람들에게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는 했다.
또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또 정말 경탄할만했는데, 적절한 때에 모티브가 되는 것을 던져주고 많은 말을 하지 않음에도 상황을 이끌어가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에게 친절하다 보니 여럿이 그녀를 따랐다.
이런 그녀인데, 내가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대략 삼사 년 정도를 알고 지냈던 우리가 잠시 정말 가까운 사이가 되었던 건, 그해 여름이었다.
메그가 어째서 나 같은 아이를 좋아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래도 그녀는 나에게 그녀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다 점차 가까이 다가왔고
그 스스로의 매력으로 나를 완전히 홀려버렸다.
나는 행복했다.

그리고 거기까지였다.
그해 여름이 지나자, 그녀는 나에게 갑작스러운 작별을 고했다.
단순한 작별이 아니라, 완전한 작별이었다.
나를 앞으로 친구로도 보지 않을 작정이라고 말했다.
나는 당연히 왜인지를 물었고
그녀는 그저 바쁠 뿐이라며 말 끝을 흐렸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만약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면 그리고 그때도 나를 기억한다면 지금부터 정확히 10년 뒤에 전화를 걸어줘.
여기 전화번호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잘 만들어진 흰색 명함 하나를 내밀었다.
거기에는 황금색 글씨로 전화번호만이 쓰여있을 뿐이었다.

그럼 안녕.

그녀는 그 이후로 정말로 나를 철저하게 무시했다.
우리는 같은 학교의 같은 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어떤 짓을 해도 그녀는 다시 나를 보지 않았다.
간혹 같은 과제가 겹쳐서 같은 조가 되거나 해도
그녀는 나를 다른 모르는 사람과 같이 친절하게 대할 뿐이었다.
나는 그런 태도에 큰 혼란을 느꼈지만
어쩐지 그녀에게 무슨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는 꾹 참았다.
그녀에게는 내가 다시 다가가지 못할 무언가가 있었다.

그렇게 우리 사이가 조금씩 멀어지고 있을 때쯤, 메그는 전학을 갔다.
메그가 전학을 간다고 한 날 아침, 학교에 가기 전, 나는 메그가 준 명함과 전화기를 번갈아가면서 보면서 명함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나 전화를 걸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이렇게 신신당부했기 때문이다.

하람.
기억해.
정확히 10년 뒤야.
그때 전화를 걸어야 해.
그전에 걸면, 나는 정말 너와 다시는 볼 수 없어.

메그는 다음에 보자. 라는 말과 모두에게 친절한 미소를 남기고는 학교를 떠났다.
많은 이들이 그녀가 떠나는 것을 아쉬워했다.
그러나 그녀는 모두와 친했지만, 정말로 가까운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떠날 때, 그녀의 눈은 어떤 무언가를 향해 반짝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


2

하람, 하람!
무슨 생각 해?

그냥.. 좀 옛날 생각.

오늘은 그로부터 10년이 되기 정확히 사흘 전이다.
나는 메그가 준 명함을 아직 들고 있다.
흰색 명함은 시간의 흐름에 점차 나이를 먹으며 누런빛으로 변했고
나 역시 그만큼 나이가 들었다.
그러나 내 기억만큼은 나이가 들지 않고 또렷이 남아,
언제든 다시 떠올리고자 하면 행복했던 그해 여름과 메그에 대한 생각으로 온통 머리가 채워지곤 했다.

아, 나에게 무슨 생각을 하냐고 물은 이는 얼마 전 대학교에서 만난 새로운 친구, 바흐다.
나와 그녀는 조별 과제에서 만나서는 친해졌다.
그녀는 매우 친절하고 또 착한 사람이다.
비록 메그 같은 사람은 아니지만 말이다.

뭐야..
넌 뭐가 그렇게 생각이 많냐?
맨날 가만히 앉아서 굳은 표정으로 땅만 보잖아.

그냥 이 생각 저 생각 할 게 많지 뭐.
하하..

그녀는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다시 물었다.

오늘 저녁에 뭐해?
시간 있으면 밥이라도 먹을래?

아, 오늘은 저녁에 중학교 친구들 모임 약속이 있어서 좀 어려울 것 같아.
설마 모르는 사람들만 잔뜩인 모임에 오고 싶진 않겠지?

그래. 알았어.

그녀는 휙 고개를 돌리고는 어쩐지 조금 빠르면서도 단호한 발걸음으로 나와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나는 이 모습을 보며 순간적으로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내일 오전 수업은 10시야.
잊지 말고 일찍 일어나 하람.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고개를 돌려서는 나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그녀는 늘 돌아가다 말고도 다시 고개를 휙 돌려서는 나에게 무언가를 말한다.

알았어.

나는 가볍게 대답하고는 늘 익숙한 길을 걸어 나와, 자취방에 과제와 노트북이 들어 있던 배낭을 대충 던져놓고는 잠시 한숨을 돌린 뒤,
가벼운 옷차림에 스마트폰 하나만을 들고는 열차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장 빠른 고속 열차를 끊어서 타자, 창밖은 벌써 해가 지기 시작하여 하늘은 어둑 어둑, 푸른빛이 감돌았다.
그러나 그 아래로 약간만 고개를 내리기만 해도, 눈에 들어오는 도시의 환한 불빛들은 마치 땅에 그들을 아로새기어, 밤이면 세상을 지배할 어둠과 맞서 싸우리라는 듯 눈부시게 빛났다.

열차가 점점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하자, 불빛들은 점차 듬성듬성 작아지다가 끝내는 사라졌고 창밖은 가로등조차도 몇 개 안 보이는 어두운 밭길로 변해갔다.
내 고향, 내 집, 내 학교였던 곳과 점점 가까워짐에 따라 내 마음은 두근거렸다.
이제는 1년에 서너 번 올지도 모르는 곳이지만, 여전히 그립고 어쩐지 짠한 마음은 내 안에 가득 차 출렁이고 있다.
열차가 시골에 가까워질수록 내 마음도 점점 현재를 떠나 과거로 움직인다.
어쩐지 돌아오면 15살의 그녀, 메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착각마저 든다.

고속 열차는 서지 않을 것만 같은 조그마한 간이역에 도착했다. 내가 지금 시간 여행을 한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오래된 느낌의 동네, 울퉁불퉁한 흙길을 십 분 정도 걷자, 조그마한 포차 하나가 나왔다.
미닫이문을 열자, 그리 가깝지는 않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얼굴들이 나를 반긴다.

드르륵

어.. 야!

취하지 않은 적은 수의 몇 명이 잠시 나를 반겨주는 척하더니 이내 잠잠해진다.
그럴 만도 하다.
나는 학창 시절 조용한 아이였기에 나를 기억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모임은 이미 서너 번 있었고 나는 그때마다 참여해서 어떻게든 옛 학교 친구들과의 추억을 떠올리고 그들과 어울려 보려고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그 이후로는 그냥 와서 적당히 분위기만 보면서 맥주나 홀짝거리고 있다.
친구들은 이 얘기 저 얘기를 한다.
이미 학교를 빠르게 졸업하고 취업에 성공한 친구들도 있고
대학원에 진학한 친구, 아니면 그냥 백수로 놀거나 자기만의 회사를 차리려고 계획 중인 친구들도 있다.
친구들은 처음에는 여럿이 이야기를 하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이내 자신과 상황과 처지가 비슷한 친구들끼리 모여서 열띤 이야기를 나눈다.
모임의 분위기는 서서히 무르익어가고 몇몇 흥분한 친구들은 간혹 바깥에 나가서 뭔가를 게워내고는 다시 들어오곤 한다.

하지만 정작 나는 그 안에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
이런 느낌은 어릴 때부터 쭉 이어져 왔다.
내가 그들과 정말 달라서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 이상하게도 어울릴 수가 없다.
그나마 나와 가까웠던 사람은 메그뿐..
그러나 메그는 한 번도 이 모임에 나온 적이 없다.
그리고 메그에 대해 친구들이 말하는 것도 들어보지 못했다.

맥주를 홀짝이는데, 누군가가 내 등을 톡톡 치는 느낌이 들어 오른 편을 돌아보니, 한 친구가 따라나오라는 시늉을 했다.
나는 그 친구를 따라 나갔다.


3

친구는 남들이 토해놓은 자국들이 있는 담벼락을 피해서 가장자리에 있는 담벼락에 기대고는 말을 꺼냈다.

내 이름은 태호야.
나 기억하니?
너랑 같은 반이었고. 신문부였는데.
지금은 신문사 취직했어.

태호는 그러면서 명함 하나를 퉁명스럽게 내밀었고
나는 명함에 쓰인 그의 이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기억이 나질 않았다.

기억 못 하는구나.
괜찮아.
널 부른 건 그 때문이 아니고..

태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하람. 너 메그 생각하고 있지?

그걸 어떻게..?

어떻게 긴.
딱 봐도 알지.
같은 학교 다닐 때 별로 가깝지도, 친하지도 않은 친구들 모임에 매번 나오고.
항상 올 때마다 우리랑은 가볍게 인사만 하고 두리번거리다가 앉아서 말없이 맥주만 몇 모금 홀짝이다가 가잖아.
기자의 직감이라고 해야 되나?
우리 모임마다 계속 안 나오는 사람도 메그밖에 없고 말이야.
세상에 재미도 없게 아무 말도 안 하는 어색한 모임에서 가만히만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딨겠어?

태호는 담배를 입에 물고는 불을 칙 하고 붙이고 연기를 한번 후하고 뿜으며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메그는 지금 잘 지내고 있어.
여기 오지 않을 만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나는 조금 불신하는 듯한 말투로 되물었다.
그러자, 태호는 또다시 명함 하나를 자켓 주머니에서 꺼내 척 내밀었다.

이 회사 알아?

나는 명함을 받아들었다.
명함에는 요즘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유명한 스타트업의 로고와 이름이 적혀 있었다.

당연히 알지.
이번에 대규모 투자 받은 유명 스타트업 아니야.
기사에서 새로운 기업이라고..
곧 상장할 거라던데..

내가 지금, 이 회사 단독 취재진으로 있거든?
이 회사가 좀 이름만 알려졌다지, 다른 건 비밀스러운 게 많아.
이번에 우리 신문사랑 단독 계약으로 다 알려질 예정인데..

근데 그게 메그랑 무슨 상관이야?

메그가 이 회사 사장이야.

뭐? 메그가 이 회사 사장이라고?

나는 순간적으로 크게 소리를 쳤다.

쉿, 쉿 조용히.
정보는 곧 돈이야.

아니, 그런데 이 회사 사장님 이름은 메그가 아닌데?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한 번도 들어보질 못할 수가 있지?
이렇게 유명한 회사인데, 말도 안 되잖아.

말했다시피 이 회사는 사업 원칙 빼고는 되게 철저한 비밀주의를 지키고 있고,
메그는 이름을 바꾸고 산지 꽤 됐어.
이번에 투자 받기 전까진 사실 알려지지도 않은 회사였잖니.
너도 알잖아, 다들 되게 생소해 했던 거.
아무튼, 네가 메그를 되게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까.
내가 메그한테 한번 잘 물어보고 가능하면 너랑 만나게 해줄게.
관심 있는 거 맞지?

그래! 그런데..

그런데 뭐?

태호에게 메그와의 약속을 말할 수는 없었다.
메그는 나에게 분명히 말했었다.

하람.
기억해.
정확히 10년 뒤야.
그때 전화를 걸어야 해.
그전에 걸면, 나는 정말 너와 다시는 볼 수 없어.

라고.
행여나 이 모험심 넘치는 친구에게 사실을 말하면 내가 행동하기 전에 무슨 짓을 할지 모를 터였다.
이로 인해 메그와의 약속이 깨진다면, 나는 어쩌면 메그를 정말로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를 터였다.

그냥 안 볼게.
그동안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고.
메그도 나 잊어버렸을 것 같으니까.
걔가 나랑만 친한 것도 아닌데, 나랑만 보는 것도 이상하고..
괜히 친구 모임에 안 나온 이유가 있지 않겠어?
그러니까...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나중에.....

나중에?

이 귀 밝은 친구는 내가 작게 말한 것도 놓치지 않고 들었다.

아무튼 안 만나.

나는 매우 단호하게 덧붙였다.
내가 이렇게 단호하게 말하자, 태호는 언짢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 알았어.
나는 너희 둘이 좀 친한 편인 줄 알았는데..
흐음..
전학 가고 헤어진 게 아니었나?

태호는 이렇게 다 들리는 혼잣말을 하고는 고개를 한번 갸우뚱하더니, 담배를 던져서 발로 짓이겨 밟아 담뱃불을 끄고는 술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그 길로 그 자리를 빠져나와, 다시 열차역으로 돌아갔다.
메그에 대한 소식을 알게 되고 나서부터는 그 자리에 더 이상 있을 이유가 없었다.

잘 지내고 있었구나..
게다가 정말 말한 대로 성공의 길을 걷고 있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설렘 반, 걱정 반으로 마음이 가득 찼다.
이제 며칠만 있으면 메그가 준 낡은 명함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게 될 터였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풍선처럼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4

그로부터 사흘이 지났다.
본격적인 가을이 시작되는 달,
여름이 거의 가시고 가을이 시작되는 날, 나는 이날을 잊을 수가 없다.
아니,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다.
그렇다.
오늘이 바로 메그가 전화번호를 남겼던 그날로부터 정확히 10년이 되는 날이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휴대전화를 들어 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한 번호 한 번호를 누를 때마다 심장은 조금씩 더 빨리 뛰었다.
지금 느껴지는 떨림은 메그를 처음 만났던 순간으로 나를 돌아가게 하는 듯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잘 지내고 있는 걸까?
그동안 어떻게 지냈던 걸까?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나를 갑자기 밀어냈던 이유는 뭘까?
수만 가지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아 손에 땀을 쥐게 했다.
나는 속으로 열 번은 할 말을 생각하며 전화번호를 천천히 눌렀고
이내 신호가 가기 시작했다.

뚜.. 뚜... 뚜...

그러나 전화 너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기약 없는 신호만이 한참 동안 느리게, 때로는 빠르게 울릴 뿐이었다.
전화는 그 직후 아무런 응답 없이 뚝 끊겨버렸다.
다시 전화번호를 몇 번을 누르고 반복해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신호음이 한 음 한 음 천천히 날 때마다, 빠르게 뛰었던 내 심장 소리는 점차 잦아들었고 새로운 아침을 알리던 해는 뉘엿뉘엿 그 자취를 감추었다.
그렇게 메그와 약속한지 10년째 되는 날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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