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 케이크 한 조각

카테고리 없음 2024.10.26 댓글 유니밧

1

나는 지금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다. 손에는 케이크 상자 하나를 들고.
매주 금요일이면 나는 베리 베이커리에서 조각 케이크 하나를 사 들고는 병원으로 간다.

베리 베이커리에는 각종 베리류들로 만들어진 형형색색의 케이크들이 많지만, 내가 언제나 고르는 것은 작은 조각 딸기 케이크 하나다. 가끔 케이크가 없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들었지만, 내가 매주 한 종류의 케이크만을 가져가는 단골손님이라는 것을 베이커리 주인이 눈치채고는 케이크를 넉넉하게 준비해두는 모양이다.
베이커리에 방문했을 때 어쩌다 그와 눈이 마주치면 그가 한쪽 눈을 찡긋하고 윙크하면서 케이크 쪽으로 고개를 트는 것을 보면 말이다.

내가 왜 조각 딸기 케이크만 고집하느냐고?
그건 케이크를 줄 소중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우리 엄마다.
병원에서 오랫동안 원인 모를 정체불명의 병으로 투병 중인 엄마에게는 이 딸기 케이크만이 삶의 유일한 낙이다.
내가 간호사 몰래 병원 침대 옆의 탁상에 케이크와 포크를 슬며시 올릴 때면 엄마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잘 가누지 못하는 몸을 일으켜 케이크를 맛있게 한 입 넣고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고는 한다.

내가 항상 더 필요한 게 없냐고 물어도 엄마는 고개를 저으면서 딸기 케이크를 중얼거리실 뿐이다.
그렇게 나는 매주 금요일이면 딸기 케이크를 한 번 사서는 엄마가 있는 병원으로 가는 것이다.

지하철이 늦는다. 또 스크린도어 고장이거나, 열차가 오래되어서 어디선가 퍼진 거겠지.
이렇게 생각하며 기다리던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 뛰어왔다. 뭐, 사람이 뛰어오는 건 드문 일이 아니기에 가만히 있었는데.. 나에게로 곧장 뛰어와서는 내가 손에 든 케이크 상자를 낚아채는 게 아닌가!

"거.. 거기 서!
도둑이야!"

나는 순간적으로 매우 놀랐고 또 당황했지만 곧장 케이크를 훔친 도둑을 쫓아갔다.
이런 와중에 역에 서 있는 다른 사람들 중 내 쪽을 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케이크를 빼앗길 수는 없었다. 베이커리도 이미 문을 닫았을 테니까 다시 살 수도 없는 마당이고.
도둑은 곧장 지하철역의 계단으로 된 6번 출구로 부리나케 뛰어갔다. 발걸음이 어찌나 빠르고 또 가볍던지 따라가기가 벅찼다.

한참을 뛰어가서 6번 출구 끝의 빈 공터에 다다랐을 때야 겨우 도둑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도둑은 공터의 막다른 곳에 다다랐다. 오래된 나무 한 그루가 자리하고 있는 공터의 구석이었다.
도둑은 자신이 궁지에 몰렸다는 사실을 알자, 양옆을 두리번거리다 이내 도망갈 곳이 없다는 걸 알고는 휙 돌아서서는 말했다.

"정말이지..!
끈질기네!"

도둑은 15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아이는 빨간 나비넥타이에 흰색 블라우스, 연한 회색의 치마를 입고 있었다. 아마 어떤 학교의 교복인 것 같았다. 표정은 계속 뛰어와서 숨이 가빠 보였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아이는 케이크 상자만은 놓지 않고 꽉 붙들고 있었다.
아이는 말했다.

"이런 케이크 하나는 그냥 봐줄 수 없어?"

"그래도 남의 것을 훔치면 안 되지. 아무리 하찮은 거라고 해도 누군가한테는 소중한 것일 수 있는데 말이야. 남의 것을 그렇게 훔치고 당당하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아이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 나도 알아.
하지만 너무 맛있어 보여서 그랬어.
미안."

아이는 케이크 상자를 앞으로 내밀었다. 가져가도 좋다는 신호였다. 나는 가까이 가서 케이크 상자를 낚아챘다.
그런데 순간 요즘 같은 시대에 오죽하면 먹을 걸 훔쳤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사정이 딱한 아인 지도 몰랐다.
마음에서 이는 이상한 동정심에 나는 아이에게 질문을 던졌다.

"너 집은 어디니? 왜 남의 걸 훔치는 거야?"

"말해봤자.. 믿어주지도 않을 거잖아."

아이의 표정은 슬퍼 보였다.
아이를 다시 찬찬히 살펴보자 옷에는 흙먼지가 묻어 있고 몸에는 은근한 상처들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안절부절못하고 뭔가를 훔치는 걸 봐서는 아마 집을 나온 아이인 것 같았다.
대충 몰골로 봐서는 일주일 정도?
잘 타일러서 집으로 돌려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난 말이야. 들어줄 수 있어.
보아하니, 집에서 멀리 떠나온 것 같은데, 나도 그런 때가 있었거든.
내가 들어주고 믿어줄게.
한번 말해줄래?"

아이는 미심쩍은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사실 너무나 지쳐서 말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아이는 입을 땠다.

"난..
난 시간 여행자야."




2

시간 여행자라고?
그래, 세상엔 많은 사람이 있다 하지만, 오늘은 또 이상한 사람을 만났구나 싶었다.
내가 만나는 사람은 희한하게도 대체로 정신이 나가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냥 나간 것도 아니고 아주 심하게..
이젠 익숙해졌다 싶어서 그래, 어떤 망상인지 또 들어보기나 하자 하고 나는 아이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아이는 자기가 지하철 역에 서 있었다고 했다.

"난.. AA 역에 서 있었어. 여느 때처럼."

"BB 역이겠지.
AA 역은 개편되기 전 이름이라고."

"그래, BB는 AA든.
이제 막 얘기 시작한건데, 토 달지 말아줄래?
아무튼 난 그 역에서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단 말이야?
다시 돌아가려고."

"어디로?"

"병원."

"병원은 왜?"

"몸이 좀 안 좋아서."

"그렇구나."

잠시 침묵.

"근데 그때, 갑자기 지하철이 들어오면서 바람이 엄청 부는거야. 본래 바람이 부는 건 아는데 그 강도가 너무 쎘던 거 있지.
눈을 뜰 수 없을만큼 쎈 바람이 불었어.
나는 그리고 정신을 잃었지.
깨어나보니까, 똑같이 지하철 역이었어.
그냥 어쩌다 한번쯤은 그렇듯 기절했다 일어난 거라고 생각했지.
근데 어느 때처럼 6번 출구로 나왔는데, 익숙한 풍경이 아니더라고.
역 이름도 다르길래, 순간 내가 기절한 사이 누가 나를 다른 역으로 옮겼나? 이런 생각도 했어."

"어땠길래?"

"일단 주변 건물이 너무 높았어.
거기는 분명 허허벌판이었는데, 건물들이 높이 솟은 것보고 놀랐지.
그리고 하늘빛이 좀 많이 탁해졌다는 거?
요즘 하늘은 노란색 아니면 회색이라는 게 재밌었어.
처음엔 그냥 이상한 동네에 왔구나 싶었는데
지하철 역으로 다시 내려가서 지하철 노선도를 암만 봐도 이 역 빼고는 다른 역 이름들은 다 똑같더라고.
손에 엄청 얇은 전화기 들고 있는 어떤 할아버지한테 혹시 지금이 몇 년도냐고 물어서 그때 내가 시간 여행을 했다는 걸 어렴풋이 알았지."

"넌 그럼 과거에서 온거야?"

"응.
지금이 20XX년이라고 했지?"

"그래."

"그럼 30년 후로 온 거네.
어.. 근데 가만 있어 보자.."

아이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째릿하고 나를 노려봤다.

"너 지금까지 어디다 대고 반말을 한 거니?
나보다 30살 가까이 어린 게!"

"앗.. 죄송합니다."

아이가 너무 진지하게 쏘아붙여서 순간적으로 사과를 해버렸다.

"하하하하
장난이야!
내가 그 긴 세월을 산 것도 아니고
그냥 어린 나이로 여기로 온 건데, 나이가 무슨 소용이야."

아이는 쿡쿡 웃었다.
나는 다시 물었다.

"돌아가고 싶진 않아?"

아이는 갑자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 같으면 어떻겠어?
이렇게 미이래에 왔는데!
이것저것 해보고 싶지 않겠어?
알아보고 싶은 것도 많고 해보고 싶은 것도 많아.
미래에는 뭐가 있을까?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이런 상상을 예전부터 많이 했었다고!
근데.. "

"근데?"

"돈이 없어서 고생 좀 했어...
처음에는 이 사람 저 사람 다 붙잡고 내 사정을 얘기하려고도 해봤었지.
근데 역시나 아무도 안 믿어주더라고.
사실 믿어준다는 게 더 이상하지만..
근데 대체로 그냥 내가 가까이만 가도 피하더라.
아니 한번쯤은 들어줄 수는 있는 거 아니냐고!!"

"그래서 결국 이것저것 훔치고....
길바닥에서도 자보고..
내가 사실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닌데.."

"솔직히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
이렇게 어려서 어디서 취직시켜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라는 사람의 신분을 여기서 증명할 수도 없고.."

나는 잠자코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참 이런 자세한 거짓말을 쉽게도 지어내는구나 싶었다.
작가를 해도 될 상상력과 그 풀이력이었다.
아이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근데..
진짜 넌 다르구나.
내 얘길 이렇게 오래 들어주는 사람은 지난 일주일동안 네가 처음이야.."

"근데 그래서 말인데..
나 좀 도와주지 않을래?
제발..
물론 무료로 도와주라는 건 아니야!
날 도와주면 내가..
음 내가...."

아이는 한참 동안을 뜸을 들이면서 뭔가 골똘히 생각했다.
나는 아이가 생각해낼 수 있는 게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아무 것도 없이 집을 나온 애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는가.

"음..
장기를 떼어줄까?"

"뭐???"

"왜, 지금도 보면 인공 장기 같은 건 아직 안 나온 것 같으니까
내 장기를 떼가서 팔면 돈 좀 갚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무슨 정신 나간 소리야?"

"확실한 방법이긴 하잖아?"

"하아.. 네 장기 같은 건 필요 없으니까, 너무 부탁 아니면 그냥 도와줄게.
뭐 하고 싶은데?"

"진짜? 고마워!!!"

아이는 정말 뛸듯이 기뻐했다.

"대신! "

내가 말했다.

"일주일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네가 하고 싶은 것들 마음대로 하게 해줄테니까.
그런 것들 한 뒤에는 꼭 네가 있었던 곳이 어디든, 돌아가는거야.
알겠어?"

"하지만.."

"이걸 안 지킨다면 난 널 못 도와줘."

아이는 순간적으로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결단을 내리고는 조금 힘이 빠진 소리로 대답했다.

"... 알았어."




3

나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좋아..!
어디부터 갈래?"

"근데 말이야.
너 그 딸기 케이크는 왜 그렇게 지키려고 했던거야?"

아뿔사. 정신없이 아이를 쫓아오고 또 이야기를 듣다 보니 까먹고 있었다. 엄마에게 케이크 드려야 하는데.
몰래 들어갈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가 않았다.

"세상에.. 까먹고 있었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다니. 빨리 가봐야겠어.
얘기하자면 긴데 시간은 별로 없으니까.
일단 따라와.
케이크를 빨리 가져다줘야 해.

"누구한테?"

"있어."

나는 아이와 함께 빨리 달려서 지하철 역으로 다시 내려왔다.
지하철이 막 들어오고 있어서 아이와 함께 빠르게 탔다.
아이는 뛰어오면서도 계속 이것저것을 물었지만, 나는 마음이 급해서 질문에 답을 해줄 수가 없었다.

"어디가는데?
어디가는지 정도는 알려줄 수 있잖아?"

아이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물었다.

"병원.
ㅇㅇ 병원으로 가.
여기서 지하철로 5 정거장이야."

"ㅇㅇ 병원이라고?"

그 순간 아이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왜?
무슨 일 있어?"

아이는 내 말은 듣지도 않고는 중얼거렸다.

"그럼 난 네가 병원 다녀오는동안 잠깐 지하철 역 안에서 있을게."

아이는 그때부터 조용해졌다. 병원까지 가는 내내 아이는 나와 얼마쯤 떨어져서 지하철 손잡이를 잡고는 아래쪽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지하철은 다행히 빠르게 달렸고 정거장에 거의 다 도착했다.

"이번역은 ㅇㅇ, ㅇㅇ 역입니다."

아이는 지하철 문이 열리자마자 먼저 밖으로 나가더니 지하철 역 기둥 앞에 둥글게 있는 의자에 앉아서는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여기 앉아 있을게.
다녀와."

"상태 안 좋아보이는데, 여기 있어도 정말 괜찮겠어?"

"응.
빨리 다녀와.
급하잖아."

정말 그랬다.
나는 아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빨리 뛰어서 병원으로 갔다.

4층, 병의 원인이 명확하지 않은 환자들을 수용하는 병실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들어오자, 깜빡거리는 불빛들이 나를 반겼다.
간호사는 아직 자릴 비우고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살금살금 걸어가서는 맨 끝 쪽에 있는 6호 병실 앞에 다다랐다.

박경민, 호상혜, 김만덕, 지애라, 상민정
그리고 이지혜.

이지혜.
엄마의 이름이다.

나는 문을 밀어서 열었다.
병실 안은 어두컴컴했다. 거기에는 아주 작은 숨소리들이 들릴 뿐이었다.
나는 5개의 침대를 지나, 맨 끝 쪽 창가에 있는 침대로 갔다.
링거로 여러 약들이 걸려 있었고 각종 기구들이 있는 주변에 자리한 편한 듯 불편한 병원 침대,
거기에 엄마가 눈을 감고 있었다.
오늘도 독한 약들을 맞으신 모양이었다.

"엄마..!"

내가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하자, 엄마가 힘없이 눈을 약간 뜨더니, 내 쪽으로 눈을 돌리시고는 천천히 입꼬릴 올리며 웃으셨다.

나는 엄마가 볼 수 있는 눈 앞으로 케이크 상자를 살짝 흔들었다.

"늦어서 미안해요. 오늘은 좀 일이 있었거든요.
글쎄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는데 누가 케이크를 들고 튄거 있죠?
세상에 이런 날도 다 있다 그죠?
혹시 그러면서 케이크도 찌그러졌을까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상자만 좀 구겨지고 케이크는 멀쩡하네요."

나는 집에서 항상 준비해서 들고 다니는 작은 다과 접시와 포크를 탁상에 놓고는 케이크를 접시 위에 조심스럽게 놓았다.
엄마는 일회용 접시와 포크가 아닌, 건강하셨던 때
집에서 사용하시던 접시와 포크를 쓰고 싶어하셨다.
그리고 쪽지와 펜 하나 놓았다.
엄마는 말하기가 불편하셨기 때문에, 쪽지를 두면 시간이 날 때 하고 싶은 말들을 써서 나에게 주시곤 했다.
오늘도 쪽지를 갈고 이미 쓰신 쪽지는 가져간다.
엄마는 내가 매주 찾아올 때마다 항상 쪽지를 써주신다.

"케이크 직접 드시는 건 힘들지 않으세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데.."

엄마는 고개를 저으셨다.

엄마는 떨리는 손으로 포크를 잡고 케이크를 한 입 드시고는 다시 탁상에 내려놓으셨다.
나는 침대 아래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가 엄마가 케이크를 드시는 걸 보고는 일어섰다.

빨리 건강해지셔야 해요..!

엄마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셨다.

나는 병실 문을 닫고는 조용히 나왔다.

사실 건강해지라는 소리는 택도 없는 소리라는 거 안다.
이런 병은 듣도 보도 못한 병인데, 차도도 없이 계속 나빠질 뿐이라는 거.
계속 전해들었으니까.
지금 맞는 약들도 다 고통을 조금 잦아들게 할 뿐이지, 치료제가 아니라는 거..
다 들어서 알고 있다.
듣고 싶지 않아도, 듣게 되고 알게 되는 사실들이다.
그나마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게 매주 케이크를 몰래 드리는 것 뿐이다.
아니, 어쩌면 몰래 드리는 게 아닌지도 모른다.
병원에 그 흔한 cctv 하나 없을까? 엄마가 한 입 먹고 남은 케이크는 항상 어디로 가는걸까? 또 깨끗하게 씻겨져 있는 접시와 포크는?
잘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다 알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을 좀 더 좋게 보내라고 허용해준 것 뿐이다.
옷 소매로 눈 주위를 문지르자, 소매가 금방 축축하게 젖었다.



4

엄마는 작가 지망생이셨다. 엄마가 건강하셨던 때부터 늘 해오셨던 얘기다. 엄마는 종이에 글을 쓰는 걸 좋아하셨다. 스마트폰이 생긴 후에도 말이다. 글씨를 잘 쓰시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 특유의 꼬불꼬불한 글씨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쓰는 걸 그냥 즐기셨다.

엄마는 어릴 때 아플 때면 병실에서 늘 책을 읽었다고 하셨다.

"그때는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있기를 했니, 인터넷이 있길 했니,
할 일이 너무 없으니까, 책이나 읽은거지 뭐."

엄마는 늘 이렇게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병원에서 내려와, 지하철 역으로 돌아와 보니, 아이가 병원에서 가장 가까운 출구에 서 있었다.

"거기서 안 기다리고 나왔네?"

"응.
가만 생각해보니까, 네가 또 거기로 내려오려면 괜히 개찰구 통해서 또 돈 내고 들어와야 하잖아.
지하철 더 타고 어딜 갈지, 안 갈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래서 나왔어."

"병원이 이쪽 출구인진 어떻게 알았어?
이 역은 출구 거리들이 좀 많이 떨어져 있어서 병원 쪽으로 나오지 않을 수도 있는데."

아이는 체념한 표정으로 저쪽의 병원 건물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여기로 오기 전에 병원으로 돌아가려고 지하철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한 거. 혹시 기억 나?"

"응."

"그 병원이 ㅇㅇ 병원이야.
네가 다녀온 저기.
난 어릴 때부터 자주 아파서 병원을 많이 다녔는데, 그중 제일 오래 다닌 곳이 저 병원이야.
설마 저 병원이 아직 저기 있을까 해서 나와본건데, 정말 있을 줄이야. 심지어 건물도 하나도 안 바뀌었네.
30년째 지긋지긋하다 정말..
그런데 너 누구한테 케이크 가져다주러 다녀온거야?"

"아.. 우리 엄마."

"엄마가 아프셔?"

"응..."

"너..."

아이는 뜸을 들이면서 나에게로 좀 더 가까이 왔다.

"너 울었구나?
눈물 자국이 있어.
거울 좀 보고 다녀라."

"뭐야?"

"장난이야!
그럼 우리 이제 어디 갈까?"

"뭐? 네가 미래라서 볼 게 많다고 그러지 않았어?"

"아 근데 막상 이게 또 생각이 안 나네."

"그래도 가보고 싶었던 곳 있지 않아?"

"음.. 사실 공원이 가보고 싶어."

"뭐? 공원?"

황당했다.

"공원이라고? 잘못 들은 거 아니지?
겨우 그런 곳을 나랑 같이 가자는거야?
뭐 거창한 곳 없어?
놀이공원 같은 곳도 아니고 그냥 공원?"

"응."

"정말 그걸로 괜찮겠어?
기껏 밖에서 하고 싶은 거 하라고 한건데..
공원은 돈이 드는 곳도 아니잖아."

"네가 뭐든 도와주겠다고 하지 않았어?"

"그건 그렇지만.."

"그럼 공원 가자."

"알겠어."

나와 아이는 지하철 역으로 6 정거장을 지나, 강이 보이는 H 공원으로 갔다.

공원에 도착하자, 아이는 돗자리를 사오라고 시켰다.
나는 고분고분하게 따랐다.

돗자리를 사오자, 아이는 강 쪽이 보이는 곳에 돗자리를 깔고는 거기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야. 난 어디 앉으라고."

내가 그렇게 말하자, 아이는 미안미안 하면서 아빠다리를 하고 앉았다.
내가 아이의 옆에 앉자,
아이는 강 쪽을 보면서 콧노래를 불렀다.

노래는 비사이드의 안개꽃이라는 노래였다.
19XX년대에 나온 노래였다.
확실히 자신이 과거에서 왔다는 망상을 가진 아이답게, 취향도 오래된 취향이긴 하구나 싶었다.

공교롭게도 이 노래는 우리 엄마가 좋아하는 곡이기도 했다.
나는 아이에게 물었다.

"이 노래 좋아해?"

"응. 너무 좋아해.
라디오에서 나오는 걸 처음 들었는데, 그때도 돈이 없어서 앨범도 못하고 녹음도 못 해놓은 게 아쉬웠..
오? 그러고 보니까, 여기서는 혹시 노래 그냥 들을 수 있어?"

"응."

나는 스마트폰 앱을 켜고는 노래를 틀었다.
조금 오래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세상에...
너무 좋다.."

아이와 나는 노래를 들으며 석양이 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오늘은 미세먼지가 조금 나은 날이어서 야외에서 하늘을 볼 수 있었다.
한참을 지나 아이를 문득 힐끗봤을 때도 아이는 여전히 하늘을 보고 있었다.

지겹지도 않나..?

그때 아이가 입을 땠다.

"이렇게.."

"이렇게 평범한 일을 해보고 싶었어.
사실..
거창한 게 아니라."

"왜?"

"내가 네가 네 엄마한테 드릴 케이크 훔쳤을 때, 시간 여행하기 전에 병원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고 말한 거 기억나?"

"어. 그랬었나?"

"뭐야.. 별로 그렇게 크게 생각을 안했었구나.
흠.."

아이는 약간 토라진 듯이 고개를 한번 움직거리고는 말을 이었다.

"나.. 입원 환자였어.
사실 되게 오랫동안 입원했었어.
너희 엄마처럼."

"어릴 때부터 잔병치레를 많이 하긴 했는데
근데 지난 한 3년동안은 몸이 낫질 않더라고.
한동안은 너무 안 좋아서 얼마 있다가 죽는건줄 알았어."

"그래..?
지금은 좀 괜찮은거야?"

아이는 잠시 생각하고는 말했다.

"응. 많이 나았대.
금방 퇴원할 수 있을 거라더라.
그래서 잠깐 마실 삼아 나왔는데, 이렇게 갑자기 미래로 오게될 줄이야.."

"뜬금없지만, 아까 공원으로 괜찮냐는 말 말이야.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 그걸 생각하면서 강을 보고 있었나보다.

"괜찮은 것 같아."

"근데 공원은 과거에도 있잖아.
특히 여기 H 공원 같은 경우는 과거에도 있는데, 왜 굳이 지금 나랑 오자고 한거야?"

"그냥..
왠지 너랑 와보고 싶었어."

"싱겁네."

"그치?
내가 좀 그래.
난 요즘들어, 너무 거창하고 멋있는 것들보다는 사소한 것에서 의미를 찾는 편이야.
새삼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일상이 소중하단 걸 느끼고 있거든.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공원이라도, 나랑 별 거 아닌 것 같은 시덤잖은 얘길 하면서 노래도 듣고, 이런 거 하면서 공원에서 앉아 있을 수 있는 그런 일상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어."

"그렇구나..
아무래도 병원에 갇혀 있으니까 많이 답답했지?"
나는 엄마가 떠올라서 이렇게 말했다.

"응.
그게 제일 크지.
내가 성격도 좀 급해서, 퇴원하기 얼마 전이라도 그렇게 지하철 역으로 나온 거였어."

이런 이야기들을 하면서 있자, 해는 금방 졌다.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이제 갈래, 석양이 다 진 뒤는 그렇게 오래 보고 싶지 않아."

"그래."

나는 돗자리를 접고는 아이와 나왔다.




5

"어.. 근데 이제 밤인데. 어쩌지..
또 무료로 재워주는 그런 곳 찾아봐야 되나?"

"청소년 수련관 이런 곳?"

"어어 거기.
근데 내가 가는 곳마다 꽉 차 있더라."

"어디있는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사람들한테 물어보기도 그렇고.."

"너 전화도 없니?
아.. 들고 나오면 안되나?"

"집전화를 들고 나와??"

모르는 척 하기는..

"오늘은 호텔가서 자.
그리고 스마트폰도 하나 줄게."

"호텔??
너 진짜 돈 많구나?
그리고 스마트폰?"

"아니.. 그동안 돌아다니면서 고생했을 거 아니야.
오래는 못 묶게 해줘.
근데 하루 이틀 정도야 뭐..
그렇게 비싼데는 못 줘.
비즈니스 호텔 중에 내가 아는 T 호텔 있는데 깔끔하고 괜찮거든?
거기가서 쉬도록 해."

"오오 좋아!
스마트폰은 뭔소리야?"

"그 네가 본 얇은 휴대폰을 스마트폰이라고 불러."

"아아.. 지하철 광고에서 스마트폰 광고 어쩌구 하던 그게 이 얇은 전화기 얘기한 거구나."

"맞아.
우리 엄마가 쓰던 스마트폰이 있는데, 그거 임시로 줄게.
엄마는 병원에서 거의 쓰지도 않고 필요도 없다 그러셔서 그냥 우리 집에 맨날 충전중인채로 있거든.
우리집 들렸서 폰 가져갔다가 호텔로 데려다줄게."

우리는 다시 지하철을 타고 3 정거장을 지났다.
집 앞에서 아이를 잠시 기다리게 한 후 엄마 휴대폰을 가지고 내려와서는 아이에게 줬다.

"참, 너 이름이 뭐야?
일주일만 쓴다고 해도, 연락처 저장은 해둬야 할 거 아니야."

"이지혜."

뭐?
이지혜라고?

신기했다. 엄마랑 같은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진짜야?"

"누가 초면에 이름 가짜로 말하는 사람이 있나?
네 이름은 뭔데?"

"김바다."

"알겠어."

나는 기본적인 스마트폰 사용법을 알려줬다.
사실 이런 연기하는 것도 얘도 피곤할텐데..
몇 개만 알려주자, 잘 다루는 것 같았다.
아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지.
정말 정신이 이상한건지, 아니면 연기를 하는건지..

나는 아이와 호텔에 도착하고 아이는 체크인을 하기 위해 주는 종이에 이름을 썼다.
힐끗 보니, 역시나 이지혜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다.
이름은 정말 거짓말이 아닌가?
나는 숙박비용을 주고는 말했다.

"내일 뭐할지 생각해 둬.
뭐든 좋으니까."

"고마워..
근데..
왜이렇게 나한테 잘해주는거야?"

"뭐.. 그게 약속이니까?"

나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래도 좀 이상한데...?
내 나이 또래라 크게 의심 안 했다만.."

"음.. 잠깐 얘기할래 그럼?"
우리는 호텔 앞의 벤치에 앉았고 나는 내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5학년 때쯤이야.
나는 집이 싫었어.
그때부터 모든 게 삐걱거리기 시작했거든.
엄마가 아프기 시작했어.
엄마가 어릴 때도 좀 아프셨단 얘길 몇 번 하시긴 했지만.
그래도 어떻게 완치는 되셔서 잘 사셨거든.
근데 내가 5한년이 되는 해에 갑자기 다시 아프셨어.
심지어 진단도 안 나오는 그런 이상한 병에 걸리셔서.
아니, 사실 엄마가 아파서 삐걱거리기 시작했다는 건 틀린 말인지도 몰라.
나 어릴 때부터 엄마 아빠가 싸우는 건 되게 흔한 일이었거든.
아빠가 집에 잘 안 들어오셨던 게 컸지 뭐.
아빠는 꽤 큰 사업 하는 분이셨는데, 엄마가 아프고 나서부터는 아예 1년 이런 식으로 집을 비우시더니, 언젠가부터는 양육비만 남기고 아예 없어지시더라고.
근데 웃기는 게 엄마는 그런 와중에도 아빠 안부 계속 물어보시는데.. 참..
그런 상황이 그냥 너무 갑갑하고 싫더라고.
그래서 집 나왔지 뭐.

막상 근데 스마트폰도 없이 나오니까 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
모아둔 용돈도 금방 다 써버리고.
청소년 시설 같은데 들어가서 사는데, 그게 그렇게 따분할 수가 없었어.
나와서 다시 어떻게든 이것저것 해보긴 했는데 잘 안되더라고.
그래서 다시 들어갔지 뭐.
집에 근데 아무도 없더라, 알고보니까 내가 나가고 한 몇 달 지나고 엄마가 입원했더라고
집에 가도 여전히 혼자니까, 그냥 쭉 가출한 느낌이더라.
음.. 널 도와주는 건 딴 이유가 아니고,
네가 재미없게 지내는 건 두고 볼 수가 없어서야.

청소년 시설에서 지내는 건 너무 따분하잖아?
나왔으면 적어도 뭐 재밌는 거 하다가 들어가야지, 나처럼 이상하게 지내지 말고.
뭐 그런 별 것 아닌 이유.
말했다시피 내일 뭔가 재밌게 지낼지나 생각해놓으라고.
간다."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지만 내 머릿속에는 지혜라는 아이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돌아서서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자 아이에게서 문자가 왔다.
이름이 이지혜고.. 엄마와 생일도 같고.. 같은 노래를 좋아한다면..
어쩌면 정말로 이 아이는 과거에서 온 엄마인 건 아닐까?

이지혜
잘 가! 고마워.

나는 의미심장한 생각으로 답장을 적었다.




6

다음날 아침, 아이에게 문자를 했다.
찾아가도 되겠느냐고.
아이는 답장이 없었다.
아마 자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아이에게서 답장이 온 건 늦은 오후였다.

답장 늦어서 미안.
자고 있었어.
이제 슬슬 호텔 앞으로 와줘.

역시나.
나는 역을 걸으면서 지하철을 기다렸다.
이 아이가 정말로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생각하며..

오늘 따라 역은 한산했다.
평상시 이 시간쯤에도 늘 붐비는 역이라 좀 의외네 싶었다.
보이는 사람이라곤 의자 저쪽에 뒤돌아서서 앉아 있는 어떤 할아버지 한분 뿐.
할아버지 쪽을 힐끗 보자, 할아버지는 온몸을 들썩거리며 리듬 게임을 하고 계셨다.
나이드신 분 중에 굉장히 스마트폰을 능숙하게 다루시는 분이 아닐까 싶었다.
손가락의 현란한 움직임이 매우 인상깊었다.
나는 그 할아버지와 정반대편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런데 한 30분을 기다려도 지하철이 한 대도 안 들어오는 게 아닌가?
지하철 앱을 켜서 지하철이 들어오는 시간을 보려고 휴대폰에 손을 넣으려고 했는데 스마트폰에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주머니에 손을 가져다 대고 있던 찰나, 할아버지가 내 이름을 부르시는 게 아닌가!

"바다야."

"네?"

나는 갑자기 내 이름이 불린 것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아인 네 엄마가 맞다."

"네?
무슨 말씀이세요?
제 이름은 어떻게 아셨죠?"

할아버지는 게임을 멈추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할아버지는 흰수염을 기르고 계셨다.

"고민하고 있지 않았니?
그 아이가 진짜 과거에서 온 것일지 아닐지, 그리고 네 엄마인지 아닌지를 말이야."

"그걸.. 어떻게...
아니 그보다 대체 누구시죠?"

할아버지는 한숨을 쉬시며 말을 이으셨다.

"하아.. 왜 이렇게 답답하게구는거니 바다야.
이쯤되면 그냥 절대적인 어떤 존재다 생각하고 넘어갈 수 없겠니?"

"그걸 어떻게 믿을 수 있죠?"

잘 생각해보렴.
네가 이 지하철 역에 어떻게 왔지?

그러고보니.. 집에서 나온 것이 생각나지 않았다.
유독 사람이 없게 이상했던 역 풍경도. 지하철이 지난 30분간 한 대도 들어오지 않았던 것도..
그렇다면..

"이제 알겠니?
넌 이미 내 세계 안에 있어."

"누구시죠?"

말했다시피 그냥 절대적인 존재라고나 해두자꾸나.
굳이 말하자면 시간의 관리자 같은 사람이라고나 할까.
저승사자, 산신령. 뭐 아무렇게나 불러도 상관은 없단다.

할아버지는 그러면서 웃음을 지으셨는데, 그 웃음에는 인자해보이면서도 어쩐지 두려움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참 그동안 널 보면서 답답했어. 그렇게 힌트를 줬는데도 아직 고민하는거냐?
독자도 알고 작가도 아는데, 너만 모른다. 너만."

"네??"

"그 아이는 네 엄마야.
내가 이리로 불렀지."

"왜죠..?"

마지막으로 너에게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란다.

"무슨 기회요?"

"얼마 남지 않았어.
현명하게 선택하렴."

"잠시만요. 이게 다 무슨 말씀이시죠?"

"그럼 이만.."




7

진동 소리가 점점 더 크게 울렸다.
눈을 떠보니 내 방 침대였다.
휴대폰에는 전화가 1분 간격으로 무려 10통이나 와 있었다.
병원으로부터 온 전화였다.

나는 황급히 다시 전화를 걸었다.

"아..! 받으셨다.
이지혜 님 아드님이신가요? 어머님이 위독하세요. 빨리 병원으로 와보세요!"

전화기 너머로 얼핏 들리는 불안한 소리들.
나는 전화를 얼른 끊고는 밖으로 나가서 택시를 잡았다.

"ㅇㅇ 병원이요.
최대한 빨리 가주세요."

택시는 빠르게 달려서 병원 앞으로 도착했다.
나는 다급한 마음으로 병실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거기에는 엄마가 있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숨을 껄떡거리며 쉬고 내쉬는 엄마가.
주변에는 여러명의 의사와 간호사가 붙어서 안정을 취하게 하기 위해 여러가지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끔찍했다.
내가 거기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는 엄마를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통을 휘감은 엄마를..
어쩌면 끊어지는 게 다행인지도..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알고는 잠자코 병실 밖으로 나왔다.
마지막을 볼 용기가 나질 않았다.
나는 병실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훌쩍거렸다.

한참이 지나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엄마의 소리가 잦아들었다.
다 끝난걸까.
이제 고통이 엄마를 영원히 놓아준걸까?

나는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땀을 한바가지 흘린채로 숨을 쉬며 잠을 자고 있었다.

간호사는 다시 괜찮아졌지만, 이제 서서히 마음의 준비를 해야할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터덜터덜 병원을 나왔다.
지혜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호텔로 와줘.
가고 싶은 곳이 있어."

나는 호텔로 갔다.

호텔 앞의 벤치에 앉아 있는 아이에게서 엄마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아이는 나를 쳐다보고는 빙긋 웃었다.

"나 도서관에 가고 싶어."

"...?"

"도서관?"

"응.
아니면 서점이라도 괜찮고."

"미래에 와서 하고 싶은 게 도서관이야?"

"응."

그런 곳은 혼자 가도 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나는 아이와 함께 따라갔다.

"알았어. 이왕 가려면 큰 도서관으로 가야지."

나와 아이는 지하철을 타고 동네에 있는 C 도서관으로 갔다.

그런데 가는 와중, 아이가 갑자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잔기침 정도였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기침은 멎지 않고 더 커졌다.
사람들은 따가운 눈초리를 보냈고 아이는 다음 정거장에서 내리자는 시늉을 했다.
아이는 내리자마자, 주머니에서 어떤 약을 꺼내고는 삼켰다.

"괜찮아..?"

아이는 괜찮다는 표시를 냈다.
막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에게 다녀온 와중이라 더 걱정이 되었다.

"여기 와서는 괜찮았는데.."

"너 괜찮은 거 맞아?"

아이는 끄덕였다.

"도서관이나 데려다줘."

나는 동네에서 알고 있는 가장 큰 도서관으로 아이를 데리고 갔다.

도서관에 도착하자, 아이의 눈이 빛났다.
아이는 책을 여러권 보더니 골라서 창가 자리에 앉았다.

아이는 주로 문학을 골라서 읽고 있었다.
아이와 조용히 있는데 아이가 말을 꺼냈다.

"내가 병원에 있을 때, 그나마 유일하게 봤던 게 책이었어.
병원에 계속 있으면 심심하잖아..
그래서 책을 빌려서 보게 해주셨지.
근데 그러다보니까 나도 직접 책을 써보고 싶더라고.
근데 허락을 안 해주시더라."

"도서관 와서 보니까, 내가 보던 책보다 훨씬 새로운 책들도 많네.
결국 명작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그대로인 것 같지만.."

아이가 고른 책들이 주로 죽음이나 병사에 관련된 것들이라는 게 조금은 섬뜩했다.



8

일주일이 지났다.
아이가 다닌 곳들은 굉장히 평범하고 어찌보면 과거에서도 다닐 수 있는 곳들이었다.
나는 더 좋은 곳들을 다니고자 사는 마음에 여러군데를 추천해주기도 했지만, 아이는 나름의 기준이 있는지 자신이 가자는 곳만 나를 데리고 다녔다.
나는 아이와 함께 다니면서도 매일 병원에 들렸지만, 엄마는 고요하게 잠만 주무실 뿐이었다.

이번주 금요일은 특별한 날이다.
딸기 케이크를 전해드릴 날일 뿐만 아니라, 엄마의 생일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시한부인 사람에게..

아이가 말했다.

"나 그러고보니까, 오늘이 생일이다?
맨날 병원에 있다 보니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집이 엄해서 생일 챙김 받은 적도 없는데..
까먹고 있었네."

나는 중얼거렸다.

"알아.."

"어떻게? 어떻게 알아?"

"그야.."

"너도 참 별종이다."

"아무튼 나 그래서 말야.
내가 처음에 훔치려고 했던 그 케이크 먹어보고 싶어."

"그래? 그거라면 안 어려워."

난 늘 금요일이면 가던 베리 베이커리로 아이와 함께 갔다.

거기에서 우리는 초를 꽂고는 조촐한 생일 파티를 열었다.

아이는 초를 끄고는 말했다.

"지난 일주일간, 함께 다녀줘서 고마웠어."

"아니 뭘..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난 다른 걸 바라는 건 없어.
그냥 딸기 케이크 한 조각이랑 내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 한 명이면 충분해.
여기는 현실을 잊기에 좋은 곳이거든.
신기하게 여기 온 이후로는 거의 아프지를 않았어.
어쩌면 미래는 사람을 치료해주는 약인지도 몰라."

"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어.
피해를 끼치고 내 자신도 힘든 그런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너무 힘들었어.."

돌아가야만 해!
라고 말하려 했지만
근데 정말 돌아가는 게 맞는 것일까?
죽지는 않겠지만, 평생 아프면서 사는 인생인데..

"내가 가는 모든 곳, 모든 시간들이 다 고통일 뿐이었는데
여기선 자유로워.
나를 아는 사람도, 그래서 걱정하는 사람도, 찾는 사람도, 아무도 없으니까.
난 그냥 모든 게 다 피곤했거든.
그냥 다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근데 그게 이뤄진거야."

"사실.. 지하철 역.
그냥 산책하러 나온 게 아니었어.
난 죽으려고 나왔던 거야.
지하철로 몸을 던지려고 했었어."

"근데, 그때 어떤 할아버지가 오시더니, 나한테 미래에 가보지 않겠느냐고 하셨어.
나는 어차피 죽는 와중에 한번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고 승낙했지.
그렇게 여기로 오게 된거야."

"난 치료를 열심히 안 받았었어.
어차피 내 병이 치료되는 병이 아니라는 거 알았거든.
내 삶은 그저 더 나빠지는 걸 막기만 하면서 사는 삶이라는 게 싫었어."

"그만큼 돈도 들어가고 부모님도 힘들어 하시고.
나는 내가 아픈 것보다 그 주변 모든 게 싫었어."

"그래도 널 만나고부터는 힘이 생겼어.
이젠 돌아가서 한번 열심히 살아볼게.
죽는 한이 있더라도 치료도 받고 한번 살아보도록 할게."




9

"이제 작별이네."

우리는 BB 역으로 왔다.

돌아서는 아이를 보며 머뭇거려졌다.
지금 과거로 다시 돌아간다면..
지금의 엄마는 또 아프게 될텐데..
그리고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지 않으셔도 될텐데..
지금 시점에서 살아간다면 더 행복하게 사실 수도 있지 않을까?
어쩌면 지금보다 더 미래에는 치료법이 개발되어서 건강하게 살아가실지도 몰라.

"지혜야..!"

나는 엄마를 불렀다.

"가지 마.."

"나.. 네가 여기 있는 게 좋아."

"그래?
근데 어떻게 살라는거야?"

"어떻게든 살아봐.."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디있어?"

"그래도.. 방법이 있을거야.
내가 도와줄게."

나는 그렇게 말하고 화장실로 갔다.

할아버지가 가까이 오셨다.

"그래 선택했군."

"네.."

"지금 이렇게 되면 넌 사라지게 되는데 괜찮나?"

"네.."

"좋아."

몸이 투명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세상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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