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목요일, 오후 2시에는 골든 스테이션의 공중전화 앞에서 기다려.
내가 전화할게.
만약에 못하면 10분 뒤엔 네가 나한테 전화해 줘.
응..!
우리는 만난 지 5년이 된 연인 사이다.
잭은 동부의 건설 지역에서, 나는 서부의 열차역, 골든 스테이션에서 일하고 있다.
우리는 매주 목요일 오후 2시면 각자의 지정된 장소에서 걸고 받을 수 있는 공중전화를 통해 전화를 주고받는다.
뭐, 가끔은 다른 사람이 공중전화를 먼저 쓰고 있어서 서로가 2시 정각에 전화를 받지 못할 때도 있지만, 그럴 때라도 그 다른 전화가 끝나면 둘 중 한 사람이 꼭 다시 전화를 건다.
오늘도 전화 너머로 들리는 그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듣는다.
다음 주도 기다릴게.
응. 다음 주에 이번 일만 끝나면 우리 같이 골든 시티에 가서 결혼하자.
응..!
그는 열심히 사는 청년이다.
그는 나와 약혼한 이후로
지난 3년 동안 열심히 땀 흘리며 일하면서 착실하게 돈을 모으고 있다.
나 또한 골든 스테이션에서 각종 보조 업무를 하며 열심히 살고 있다.
오늘은 우리가 지난 3년간 목표했던 돈을 다 모으는 날이다.
사실 아직 골든 시티로 가서 여유롭게 살기에는 조금 빠듯하지만, 결혼하고 세를 들어 사는 집에서 한동안 먹고 살 정도는 될 것 같다.
아무래도 오늘이나 다음주 내로 그가 여기로 올 것 같다.
나는 지금 그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다.
오후 2시 정각이 되기 2분 전, 뚱뚱한 중년 신사 한 명이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오늘 정각에 전화를 받는 것은 포기해야 할 것 같다.
그와 나는 약속을 했다.
그가 2시 10분까지 전화를 걸지 않으면 내가 다시 걸기로 말이다.
그다음에는 20분, 다음에는 30분 동안에도 그가 전화를 걸지 않으면 내가 다시 걸기로 했다.
우리는 만약을 대비해서 항상 오후 3시까지는 전화 부스 가까이에서 서로를 기다린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사정이 있다고 생각하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규칙이다.
그러나 지난 3년간은 운이 좋았는지 내가 전화를 두 번 이상 걸게 되거나 전화를 받지 못한채로 돌아서게 되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중년 신사는 무려 10분 동안이나 전화를 붙들고 있었다.
2시 8분.
2시 10분이 되기 전까지는 기다린다.
2시 10분이 되었다.
오늘은 아무래도 내가 걸게 되는 날인 것 같다.
전화하러 오는 사람도, 전화가 울릴 기미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수화기를 들고는, 그와 늘 전화를 받는 동부의 전화번호를 힘차게 돌렸다.
뚜.. 뚜.. 뚜..
신호가 가는 소리.
띠띠띠띠띠띠
전화가 거절되는 소리다.
안 받네..
그래도 기다려보자..
20분 뒤, 다시 전화를 걸었다.
뚜.. 뚜.. 뚜..
띠띠띠띠띠띠
여전히 거절된다.
오늘이 바로 손에 꼽을 그 날인가보다.
그렇게 세 번 전화를 걸었고 오후 3시를 알리는 골든 스테이션의 증기 종이 울렸다.
포기하고 돌아서려는 그 순간, 전화가 울렸다.
따르릉 따르릉
잭?
나는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나야, 미나! 전화 못 걸고 못 받아서 미안해.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반장님이 파티를 해야 된다고 아우성이셨어.
겨우 빠져나왔네..
최대한 빨리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늦게 걸게 돼서 미안..
아니야! 전화 줘서 고마워.
난 또 걱정했는데..
별일 없음 됐지 뭐.
근데 잠깐, 방금 마지막 날이랬어?
응.
어휴, 마지막 날인데도 실컷 부려먹으시더라.
크크크.
내가 동부 역에서 열차를 타고 7시 좀 넘어서 도착할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뭐? 온다고?
오늘 오는 거야?
정말?
그럼.
오늘 온다고 했으니까 오늘 오는 거지!
7시 좀 넘어서 가니까 기다리고 있으라고!
...
왜 아무 말이 없어?
아니..
너무 좋아서..
우리 만난지 너무 오래됐잖아.
맞아.
한동안 너무 바빴지.
이제 이런 생활도 끝이야.
가서 지겹도록 붙어 있어줄테니까
각오하라고!
응응..!
이쪽에도 시간표 있어.
7시 10분에 도착하는 열차네.
이그. 우리 여보 똑똑하네.
내일 오후에는 우리 같이 골든 시티로 떠나는 거야!
신나지?
응..!
정말 이런 날이 오긴 오는구나.
그러게 말이야.
지난 3년간 날 기다려주느라, 고생 많았어.
아니야, 네가 고된 일 하느라 고생이 더 많았지.
다 널 위해서였어.
사랑해.
빨리 만나고 싶어.
나도..
곧 보자!
먼저 끊어.
아냐 네가 먼저 끊어.
아냐 네가 먼저 해.
야, 이러다가 날 새겠다.
내가 먼저 끊을게.
사랑해.
나도 사랑해.
그렇게 우리의 통화는 끝났다.
아가씨!
역장님이다.
역 안의 사무실에 난 작은 창문으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계셨다.
아, 오늘은 집에 안 가는가?
오늘은 열차 타고 오는 누구를 좀 기다리려고요!
오올 혹시 애인이여?
네.. 맞아요.
나는 조금 수줍게 말했다.
어이구.. 좋을 때구먼.
지금까지 매주 전화했던 것도 애인이었겠구만.
그렇죠.
오호오오오오오.
그려, 일 봐.
감사합니다!
나는 공중전화 바로 옆의 작고 긴 의자에 앉아, 책을 보며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사실 마음이 너무 들떠서 그렇게 좋아하는 책인데도 책 내용이 도무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자꾸만 시계를 쳐다보게 됐다.
열차가 들어오기로 예정된 시간은 7시 10분,
그런데 어째서일까?
벌써 30분이 지나 있었다.
역장님? 동부 역에서 오는 열차가 7시 10분에 들어오는 거 맞죠?
어엉. 보통이면 그런데..
뭔 일이 있나?
에이, 뭐 좀 지연된 거겠죠.
출발해야 되는데 기관차 보일러에 불이 안 붙었다든지, 열차 선로에 동물이 있다든지 해서 말이에요.
그러나 오후 8시가 넘자, 더 이상은 가볍게 생각할 수가 없게 됐다.
역장님. 무슨 일 있는지 동부 역에 전화 좀 해주시겠어요?
아까부터 지금까지 계속 걸어보고 있는데, 안 받는구먼..
지금 한 번 더 걸어보려던 참이네.
앗, 받았다!
나는 역장님이 전화를 받는 곳에 가까이 갔다.
뭐래요?
나는 다급하게 물었다.
역장님은 잠시만, 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열차는 제시간에 정상적으로 출발은 했다는군.
그런데.. 내가 아직 도착을 못했다고 하니까.
자기네들도 이상해서 지금 보조 열차로 순찰을 가본다는구만.
아까 전화가 안 되었던 건, 이번에 3~4시 즈음부터 동부 역 쪽에 전화선이 잠깐 끊겨서 그렇다고 하는군.
아까 아가씨가 애인이랑 통화할 때만 해도 괜찮았는데, 참 간발의 차이였어.
그렇군요..
그리고 역장님은 전화를 끊으셨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면 어쩌죠?
나는 순간 떠오르는 안 좋은 생각들에 주저앉고는 얼굴을 손에 파묻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어.
별일 아닐 걸세.
분명히 뭐 석탄이 도중에 떨어졌다던가 물이 부족하다던가 해서 열차가 도중에 선 걸게야.
그렇겠죠...?
그럼!
2시간이 흘렀다.
동부 역에서 전화가 다시 걸려온 건 늦은 밤, 오후 11시가 넘은 후였다.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불안한 마음을 달래려고 애쓰고 있었다.
따르릉 따르릉
전화 소리가 들리자마자 역장님은 전화로 뛰어가셨다.
예! 어떻게 됐습니까? 예..!
예?
아니..
예...
예.. 알겠습니다..
들뜬 표정으로 달려갔던 역장님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무슨.. 무슨 일이래요?
어떻게 됐대요?
나는 불안한 마음을 감추려고 웃는 표정을 지으려고 애썼다.
심장이 미친 듯이 빠르게 뛰었다.
저.. 그게... 그러니까...
역장님은 뜸을 들이셨다.
나이는 좀 드셨지만, 대체로 항상 발랄하고 활기찬 역장님의 그런 얼굴은 처음이었다.
역장님은 고개를 푹 숙이고는 어두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셨다.
열차 사고가 났다는 구만..
열차가 중간쯤 잘 가다가 선로를 벗어났는데...
보조 열차로 가보니까 그런 처참한 광경이 따로 없었다고 그러더군...
열차에 타고 있던 승객들은 전부...
어쩌면 좋으나...
정말 미안하네..
...
설마요.
아닐 거예요.
저희 철도는 지금까지 사고 없기로 유명한 철도잖아요.
그러나 역장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셨다.
제발.. 아니라고 해주세요.
아니잖아요..
안돼..
내 안의 무언가가 뚝 하고 끊겼다.
마지막으로 남겨놓았던 희망의 뿌리가 송두리째 뽑혀버리고 말았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통화가 그의 생애 마지막 통화였다니...
아직도 생생한데..
이럴 줄 알았다면 한 번 더 사랑한다고 말했을 텐데.
아니, 타지 말라고 말해줄 거였는데...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그날은 어떻게 집에 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내가 주면 사람들에게 뭐라고 말했는지도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뭐라고 했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내 눈앞은 오는 내내 뜨거운 눈물로 흐렸고
입은 악에 받친 소린지 슬픈 소린지 모를 절규로 가득했으며
귀는 슬픔에 닫혀, 내가 스스로 하는 소리만 들을 수 있었으니까.
그 이후로도 몇 주간.. 그리고 몇 달간...
내가 다시 역으로 일하러 돌아갔을 때도 역에서는 온통 열차 사고에 대한 우울한 소식밖에는 들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의 입에서 입, 귀에서 귀로 이 나라에 열차가 생긴 이래 가장 컸던 이 사고에 대한 이야기는 한동안 계속해서 전해져 갔고
신문에서도 이를 연일 보도했다.
이 모든 건 그저 나를 더 슬프게만 할 뿐이었다.
여러분은, 너무 많이 울면 더 이상 나올 눈물이 없어서 슬픔을 표현하는 게 그저 악에 받힌 절규밖에 남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가?
흘릴 눈물이 없어진 후, 슬픔을 표현하기에 부족한 다른 감각들의 절규는 사람을 더더욱 미치게 만든다.
그렇게 1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 비극적인 열차 사고에 대한 세간의 관심과 소문은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슬펐던 적이, 아니, 애초에 그런 사고가 있기라도 했냐는 듯 세상은 여전히 잘 돌아간다.
열차는 여전히 선로 위를 오고 가고 사람들은 저마다 웃으며 서로를 보내고, 다시 만나는 것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나도 겉으로는 그렇게 살아간다.
마음속에는 깊은 슬픔과 상실이 아로새겨진 채로 말이다.
그쯤이었나, 어디에서 이상한 소문이 들렸다.
그 열차 사고에서 죽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솔직히 헛된 희망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나에게 너무 소중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얘기가 귀에 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소문에 의하면, 죽지 않은 그 사람은 분명히 어딘가에서 여전히 살아 있으며 가끔씩은 동부 역에도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목격자도 여럿이 있다고 했다.
또 남자라고 했다.
그 일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들었다.
만약에 그라면..
정말 살아 있다면
그는 분명 나에게 전화를 줄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나는 그 후로 매주 목요일마다 역으로 다시 온다.
역에서 일하는 건 그만뒀지만, 그가 나에게 다시 전화를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가 정말 살아 있다면 언젠가는 황금빛의 석양이 노을 지는 저녁 열차를 타고 와서는 나와 함께 골든 시티로 갈 거라고 생각한다.
오늘도 나는 매주 목요일, 오후 2시에는 골든 스테이션의 공중전화 앞에서 그의 전화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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