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보레 가의 비밀

소설 2024.10.16 댓글 큐널 블로그팁

1화

이 이야기는 우리 할머니가 들려주셨던 이야기다. 달이 조금씩 차오르는 밤, 벽난로 앞에 앉아 따뜻한 불을 쬐며 초콜릿 쿠키를 먹을 때면 할머니는 그 옆의 흔들의자에 앉아 상어 호수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했다.
나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실 당시, 할머니의 정신이 약간은 오락가락하셨기 때문에 현실성이 있는 이야기라고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부터 옮길 이야기는 어느 정도의 과장, 아니 어쩌면 전체가 다 상상일지도 모를 그런 이야기다.
이야기를 들었던 당시의 상황을 더 실감 나게 표현하기 위해, 최대한 그 당시 할머니가 쓰셨던 말투를 사용해서 옮겨보려고 한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먼 옛날, 우리 시대의 역사책이 생기기 아주 오래전, 거기에는 땅이 있었단다. 오직 땅만이 거기에 있었지. 바다가 없는 시대였어. 상상이나 가니?
그러다 그 땅 한가운데에 갑자기 호수라는 게 생겼단다.
호수라는 말도 우리 시대에서 사용하는 거지
그 시대에는 사실 호수라는 말도 없었어.
땅이 온통 판판했거든.
물이 고이려면 본디 깊숙이 파인 곳이 있거나 더 솟은 땅이 있어야 하기 마련인데
그런 게 없었으니 당연히 물도 고이지 않았고 호수나 바다라고 부를 것도 없었던 거란다.
물론 작은 웅덩이 정도는 있었지.
처음에 그 호수라는 것도 작은 웅덩이 정도의 크기였어.
지금부터는 그 호수를 그냥 웅덩이라고 부르도록 하마.
사람들은 웅덩이가 생겼다가 금방 마르고 사라지는 것은 익히 보아왔기 때문에 그 웅덩이도 그냥 그런 것으로 생각하고 지나쳤단다.
그런데 이게 웬걸, 웅덩이가 마르지 않았던 거야.
오히려 그 웅덩이는 커지고 또 커져서 정말로 커다란 웅덩이가 되었지.
그래도 곧 마르겠지 마르겠지 하던 게 벌써 1년째.
웅덩이는 지금까지 봐왔던 어떤 웅덩이보다 더 커지고 더 커졌단다.
처음에는 그래도
이것도 아무리 그래봐야 웅덩이일 뿐이야
곧 마르겠지
곧 마를 거야
하고 낙천적이게 생각하던 사람들도
웅덩이가 엄청나게 커진 것을 보고 슬슬 걱정하기 시작했어.
처음에 웅덩이가 며칠 동안 마르지 않고 커질 때도 벌벌 떨면서 기도하던 사람들은 이제 종말이 오고 있다고 생각했지.
그러던 어느 날, 해가 막 떠오르는 아침이었어.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방법으로 걱정을 하던 와중에 이제껏 들어본 적이 없는 소리가 들렸어.
쏴아아
물살을 가르는 소리였단다.
웅덩이에 어떤 생명체가 나타난 거야.
사람들은 이제 공포에 떨었지.
무섭게 커지는 웅덩이에 이제 자신들이 모르는 생명체까지 나타났으니.
사람들은 이제 정말로 종말이라 믿기 시작했어.
몇몇은 마을을 떠나기 시작했지.
순진한 아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엄마를 따라 끝없는 땅 끝으로 긴 여행을 시작했어.
떠나는 이들은 언젠가는 웅덩이가 너무 커져서 땅이 모두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안고 떠나야 했지.
그러던 또 어느 날이었어.
웅덩이는 계속 커져만 가고 뭔지 모를 생명체가 그 안을 휩쓸고 다니는 소리가 들리던 때, 어느 몰상식하고 부주의한 부모로 인해
어떤 아이가 웅덩이에 가까이 가도록 방치되었어.
아이는 웅덩이로 손을 뻗었지.
자신이 물에 비치는 게 신기했던 걸까?
뭐 애들은 뭔가 신기하면 일단 만지고 보잖니.
그 순간, 지금껏 약간만 보였던 그 생명체가 물 밖으로 나온 거야!
아이는 너무 놀라 크게 울고 소리를 질렀어.
그런데 얼마 후 아이가 없어졌다는 걸 알고 달려온 사람들은 희한한 광경을 보게 됐단다.
생명체가 아이를 놀아주고 있는 것 같아 보였던 거야.
아이가 물로 내민 손에 그 생명체는 얼굴을 비벼대고 있었어.
초상 치르듯 얼굴이 울상이 되어 달려온 사람들은 그 생명체와 아이가 놀고 있는 걸 보고는 마음이 사르르 녹아버렸어.
그때부터였을까. 웅덩이는 더 이상 커지지 않았고
그 안의 우호적인 생명체만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어.
그 우호적인 생명체는 아이들을 놀아주었고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어.
더 이상 웅덩이와 생명체는 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어.
사람들은 그때부터 그 웅덩이를 호수라 불렀지.
모두가 행복했어.
마을을 떠났던 사람들도 다시 돌아왔고
모두가 행복하게 살았지.

할머니는 늘 여기까지 말씀하시고는 눈을 감으셨다. 마치 그 시대에 계시기라도 했던 것처럼.
어렸던 나는 물었다.

"할머니는 그 시대에 계셨던 건가요?
어쩜 이렇게 생생하게 말씀을 잘 하세요?"

그럼 할머니는 대답해주셨다.

"아니란다 아가.
나는 그 시대 사람이 아니야.
그저 어쩌다가 들었을 뿐이지.
나는 어쩌다 들은 것을 생생하게 말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단다.
자, 어디까지 했더라.
그렇지!
이제부터는 조금 더 잘 들어보렴."

그러면서 할머니는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셨다. 아마 어린아이에게 하기에는 조금 무거운 이야기일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러셨으리라. 지금 생각하기로는 엄마가 가까이 계시진 않는지 살피셨던 것 같다.
엄마는 할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나에게 하시는 걸 알았다면 가만 있지 않으셨을 테니까.
어떤 할머니들은 너무 오래 사셔서 엄마는 가려서 하는 이야기를 사랑하는 어린 손주에게 그냥 하시곤 한다.
아무튼 할머니는 눈치 살피기를 마치시곤 이야기를 이어 나가셨다.

여기서 끝나면 정말로 행복한 이야기겠지?
그렇지만 밝은 부분이 있다면 어두운 부분도 있기 마련,
이 할머니의 이야기는 교훈적이란다.
사람들은 언제나 저마다의 욕심을 가지고 있지.
호수와 우호적 생명체로 인해 사람들은 행복했지만
거기서 만족하진 않았어.
그들은 무언가를 더 원했단다.
그러던 와중에 일이 터졌어.
어느 날, 한 잔인한 젊은이가 작살을 들고 그 생명체를 죽인거야.
생명체는 괴성을 지르며 뭍으로 떠밀려 왔고
청년은 자랑스럽게 죽은 생명체를 어깨에 들쳐 업고는 마을 사람들에게 자랑하러 갔어.
사람들은 처음에는 경악을 금치 못했지.
어떻게 그렇게 착한 생명체에게 그럴 수가 있냐고.
청년은 큰 질타를 받고 마을에서 쫓겨났어.
그런데 이상도 하지.
그 청년이 멋있다고 생각한 다른 청년들이 있었나봐.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만든 충격적인 일을 멋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갑자기 그 생명체들이 떼죽음을 당한 게 목격되었어.
마을 사람들은 청년들을 한데 모아서 질책하고 그런 일을 다시는 하지 못하도록 서로 협약을 맺었지.
청년들은 진심으로 반성했고
그렇게 일이 끝나는 것처럼 보였어.
그런데 웬걸,
그 생명체가 여전히 죽어나가고 있더라고.
분명히 서로 협약을 맺었는데도 말이야.
예전처럼 재미로 여러 마리를 죽인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누군가 암암리에 생명체들을 죽이고 있었어.
그래도 그 수가 많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그냥 장사를 지내주고 그 누군지 모를 사람을 크게 책망하진 않기로 했어.
워낙 처음에 그 생명체들이 떼죽음을 당했을 때의 충격이 커서
지금 다시 죽임에 대한 책임을 묻게 되면
일이 커져서 시끄러워질 걸 우려한 거지.
또 지금이나 그때나 사람이 어쩌다 한 명 죽어나가는 일은 흔했거든.
그때마다 근데 우린 장례를 치르잖아.
그냥 마을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어.
그렇게 그냥 그 일은 흐지부지 끝났어.
그게 발단이 되었던 걸까?
다들 쉬쉬하는데
그 생명체의 고기가 천상의 맛이라는 소문이 돌더구나.
사람들은 어떻게 감히 그럴 수가 있으냐고 입 밖으로는 냈지만
사실은 그 고기가 먹어보고 싶었어.
사실 예전엔 어디까지나 그 생명체가 없이도 잘 살았거든.
호수도 처음엔 공포의 존재였었고.
호수가 생긴 이후로 어쩌다가 생명체의 도움을 받는 게 전부일뿐.
삶에서 그렇게 크게 중요한 위치는 아니었어.
더군다나 몇몇 개체가 죽는 걸 신경을 안 쓰게 된 이유 중에 하나가
그 생명체의 수가 점점 빠르게 불어났거든.
사실 너무 많아져서 한두 마리가 죽어도 사실 죽었는지도 모를 정도였어.
점점 생명체의 고기를 먹은 사람들이 소문을 내기 시작했어.
천상의 맛이라더라.
이 세상에 없는 맛이라더라.
그리고 비밀의 식탁이라는 모임이 생겨났지.
그 당시엔 물론 비밀이었기 때문에
수면 위로 떠오르진 않았었지만
이미 알 사람들은 다 알았어.
더이상 참을 수 없는 순간이 왔지.
새해가 지나기 전,
마을의 대표가 말했어.
아주 당당하고 용기 있는 태도였단다.
'우리 이제 더이상 비밀의 식탁을 지속하지 맙시다.
고기는 정말 천상의 맛이라는 걸 모두가 압니다.
우리 삶의 축복 중에 하나는 음식입니다.
그걸 마다할 수 있겠습니까?'
순수한 반은 놀라고 알걸 이미 다 아는 반은 동의했어.
아직까진 반반이었지.
여전히 생명체가 그렇게 많지 않을 적
친구 같았을 때를 기억하던 사람들은
대표가 돌았다고 생각했어.
결정적으로 사람들이 돌아선 건
그해 가을,
어느 때처럼 아이가 물가에서 놀고 있었는데
아이가 감쪽 같이 사라져 버린 사건이 터졌어.
아이는 아무리 찾아도 없었지.
그후로 그 아이가 입고 있던 옷이 물가로 밀려왔어.
사람들은 분노했지.
착한 생명체는 이제 없었어.
생명체는 아이를 살해했어.
사람들은 모두 분노했어.
대규모 사냥이 시작되었지.
그들은 그때부터 그 생명체의 이름을 상어라고 불렀어.
사람들은 저마다 작살을 들고는 호수에 수없이 많아진 나쁜 생명체들을 죽이고 또 죽였어.
그리고 먹었지.
욕하면서.
그런데 세상에 정말 맛있지 뭐야.
세상에 그런 맛이 있을 수가 없었단다.
분노도 있었지만
동시에 맛에 대한 궁금증도 함께 있었어.
그렇게 그들은 명분도 있었고 욕심도 있었기에 상어를 죽여서 먹었어.
그러기를 10년이 흘렀단다.
이제 아이가 실종된 사건은 사람들 뇌리에서 서서히 잊혀 가고 있었어.
그것보단 상어 고기가 맛있다는 사실만 남아서
그저 고기를 얻기 위해 상어를 죽일 뿐이었지.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많이 죽이다보니까
상어가 단순히 고기만이 좋은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는 거야.
사람들은 상어에 대해 연구하면서 상어로 다른 것을 할 수는 없을까 생각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게 그럴 수 있다는 게 밝혀졌어.
상어의 기름은 불을 밝히는데 쓸 수 있었고
상어의 가죽은 가방이나 옷을 만드는데에도 쓸 수 있었지.
상어의 이빨을 칼로 사용할 수 있었어.
약으로도 복용되었고
효과도 만점이었어.
사람들은 상어를 더 많이 잡았어.
이전보다 훨씬 많이.
상어가 멸종되진 않았느냐고?
글쎄 그 당시의 상어는 너무 많아서 잡아도 잡아도 계속 나오더라고.
10년동안이나 그 짓을 했는데도 많았다고 하니까
얼마나 많았는지 알겠지?
물론 동시에 다른 변화들이 생기긴 했어.
호수가 다른 마을들에도 생겼지.
상어들도 그 다른 마을의 호수들에 나타났고.
그래도 어느 정도 크기가 되면 멈추더라고.
다들 그걸 알아서 안도했지.
그렇게 많은 호수에서 많은 상어들이 잡혔어.
그런데 몹시 큰 일이 일어났어.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큰 일이었지.
그 일이 뭐냐하면..

"할머니?!"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이 이야기를 하시던 도중, 할머니는 갑자기 잠드셨다.
중간 쯤 이야기하실 때도 사실 좀 잠오는 목소리시긴 했는데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잠드실 줄은 몰랐는데..
그리고 일하러 나가셨던 엄마가 들어오셨다.
엄마는 말했다.

"할머니 주무실 때는 깨우지 말렴."

"네.."

엄마는 할머니가 앉아 계신 의자를 천천히 뒤로 젖혀드렸다.

"너도 이젠 가서 자도록 해!"

"네."

나는 조용히 대답을 하고 위층에 있는 내 방으로 올라갔다.
어린 나는 올라가서 생각했다.

할머니 이야긴 참 이상해.
상어는 지금은 그렇게 많이 먹지도 않고
무섭기만 한데.
그 이후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걸까?
아니 애초에 말씀하신 상어가
내가 학교에서 배운 그 상어가 맞을까?

이런 생각들을 하다가 그냥 잠들어버렸다.
이튿날, 나는 할머니에게 내려가 말했다.

"할머니 하시던 얘기 마저 해주세요."

"응? 내가 무슨 얘기를 했었더라?"

"어제 해주시던 얘기요!
하시던 얘기 마저 해주셔야죠!
말하다가 잠드셨잖아요."

"응?
난 잘 모르겠구나."

할머니는 이상하게 모르는 척을 하셨다.

"할머니!
저한테 지금까지 몇 번이나 해주신 얘기잖아요.
불 가에서 자주 해주신 얘기 말이에요!"

"할머니한테 그렇게 떼쓰면 안 돼!"

엄마가 말했다.

"네가 꿈을 꾼 모양이구나.
이 할머니는 상어 호수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단다. 후후후후."

"그래. 나도 그런 얘긴 들어본 적이 없어.
엄마가 너보다 얘길 더 들으면 많이 들었겠지.
너한테만 다른 얘길 해주셨겠니?"

"그건 아니지.
손주한테만 하고 싶은 얘기도 있단다."

그러면서 할머니는 나에게 윙크를 하셨다.
할머니와 나는 무언가 통하는 게 있었다.

"아 엄마!"

엄마가 소리치셨다.

"후후후후."

할머니는 특유의 추임새와 함께 흐뭇한 표정을 지으시더니 곧 자기 방으로 들어가셨다.
나는 좀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런 기회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할머니는 그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해주신지 사흘 후에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씀을 잘 하시던 분이
왜 갑자기 돌아가셨는지는 모른다.
간혹 세상에는 쉽게 설명되지 않는 일들도 있고
나에겐 이 일이 그런 일 중 하나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함께 살던 정든 옛 시골집을 떠나
엄마는 나와 도시로 올라오셨고
할머니의 모닥불 이야기와 그 추억을 간직한 집도 이제 내 뇌리에서 점점 희미해져만 가고 있다.

2화

돌아가신 할머니가 유일하게 남겨주신 건 목걸이 하나다.
고동색의 특징없는 목걸이 하나
뭔가가 뒤에 새겨져 있긴 하다. 근데 글씨가 닳아서 거의 안 보인다는 것이 함정.
그밖에는 정말 아무 장식도 없고 멋도 없어서
지금은 서랍에 처박아 두었다.
처음엔 그래도 할머니가 소중한 분이셨기 때문에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항상 목에 걸고 다녔는데
도시 학교에서 어떤 친구가 아주 거하게 놀린 이후로는 상처 받아서 안 걸고 다닌다.

사실 목걸이를 서랍에 처박아 둔 이유가 단순히 친구가 놀려서만은 아니다.
목걸이를 목에 걸고 있을 때면 자꾸 이상한 일이 일어나곤 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몸이 붕 뜨는 느낌을 받기도 하고 순간적으로 여러 사람이 내 앞에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모이기도 했다.
평소엔 나랑 아무 관련도 없고 나한테 관심도 없던 아이들인데 말이다.
한번은 그냥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잠시 눈을 붙이고 있었는데 교실에서 집으로 순간 이동했던 적도 있다.
못 믿겠다면 어쩔 수 없지만, 적어도 나는 진실을 얘기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날 참 고생이 많았다. 엄마한테는 지금 집에서 뭐하고 있냐고 혼나고 학교에서는 선생님한테 어디 갔었냐고 혼나고.
사실을 말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것은 당연지사.
그렇지만 어떨 때는 도움이 될 때도 있었다.
우리 학교는 불량배들이 꽤 판을 치고 다니는 편이다.
그중 특별히 질이 나쁜 아이들이 있었는데, 내가 그 아이들이 있던 반에 들어가 있었다.
그 애들은 학교에서 아주 이름난 불량 청소년들이었다. 기본적으로 그 애들은 자주 아이들의 물건을 훔치고 몹시 괴롭히고 따돌리고 편을 가르는 그런 아이들이었다.
이렇게만 말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그 정도가 매우 심했다.
여기에 일일이 그 애들이 저지른 문제들을 다 쓰고 싶지는 않아서 이만 줄이지만
어떻게 그렇게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다니면서도 여전히 퇴학 당하지 않고 학교를 멀쩡히 다니고 있는지는 지금도 참으로 의문이다.
나도 한때는 그 무리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였다. 내 조용한 성격은 그 아이들이 나를 따돌리고 괴롭히기에 안성맞춤인 것 같았다.
아무튼 나는 어느 날, 그 아이들에게 학교 끝의 구석진 골목으로 불려갔다.
대장 격인 아이가 나에게 주먹질을 했고 나는 반사적으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곤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주먹이 날아오는 기척은 느껴졌는데, 한동안 아무런 느낌이 없어 눈을 떠보니 그 아이가 갑자기 내 앞에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우두머리가 쓰러지자 그의 추종자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곤 그 애들은 두 번 다시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그 대신 나는 대다수의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게 되긴 했지만..
이상한 소문이 돌았던 모양이다.
그래도 더이상 괴롭히지 않는 게 어딘가.
아무튼 이런 일들은 도저히 일반적으로는 설명될 수가 없었고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발생할 때마다 유일한 공통점은 목걸이를 목에 걸고 있었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이 목걸이에 무언가 이상한 것이 있다고 결론 짓고 차고 다니는 것을 완전히 그만두게 되었다.

뭐 그건 그렇고
요즘은 마음에 드는 친구가 생겨서 다른 건 눈에 안 차는 중이다.
굉장히 멋있는 아이다.
적당한 키에 구릿빛 피부, 똑똑하고 강단있고 아름다운 아이다.
사람에게 호감이 가는 이유는 사실 별개 없다.
엄청 특별해 보이거나 아니면 나랑 좀 잘 맞을 것 같다거나
나에겐 둘 다였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이 아이의 유일한 단점이라고 할만한 점은
좀 수업을 자주 빠진다는 것 정도?
결석이 잦고 숙제를 잘 안 해온다.
매우 불성실한 학생이다.
그럼에도 선생님이 질문했을 때는 거침없이 대답하고 시험을 봐도 점수도 좋으니
희한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저번에 어쩌다가 다른 아이들과 피아노실에 있는 걸 봤는데
세상에 피아노도 잘 치는 게 아닌가!
별로 자기는 잘 치지 않는다고 겸손하게 말하는데
그런 말 하면서도 손가락이 건반 위에서 춤추듯 날아다녔다.
연주하면서 집중하는 모습은 너무 멋있다.
그럴 때는 반대로 피아노를 칠 때면 뻣뻣하게 굳어버리는 내 손이 원망스러워 아주 약간은 질투심에 불타오르기도 하지만
그래도 멋진 걸 뭐 어쩌겠는가.

지금 나는 그 애가 교실 문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지난 몇 개월간 그래왔듯이 말이다.
오늘은 제발 참석하기를!
나랑 그 애랑은 자리가 좀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 애를 마음 놓고 보는 시간을 아주 조금이라도 더 늘이기 위해서는 그 애가 들어오는 순간부터 눈여겨 봐야한다.
평상시엔 뭔가 항상 생각하고 있는지 내가 가볍게 손을 흔들어도 못 보고 그냥 자리에 앉을 때가 많은데
저번에는 한번 나를 발견하고 똑같이 손을 흔들어줬다.
얼마나 감동스럽던지!
손만 흔들어준 게 아니라
기분이 좀 좋았던건지
살짝 웃어줬는데
그게 그렇게 가슴이 두근댈 수가 없었다.
으아아

오전 8시 40분.
그 애는 주로 9시 쯤에 들어오는데
나는 덜렁대는데다 느긋하기까지 해서 미리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꼭 타이밍이 안 맞거나 늦기 때문에 일찍 왔다.
엄마도 늘 내 그런 부분을 지적하시면서
늘 하시는 말씀이
'반박자만 일찍 준비해!'라서
그 말을 좀 충실히 따르고 있다.

오전 8시 41분.
시간이 너무 안 간다.
나는 그러면서 이것저것 생각을 했다. 내일은 뭐 먹지. 뭐 입지. 여행 가고 싶다. 아니, 집에 가고 싶다. 같은 그런 자질구레 한 생각들이었다. 그러던 와중 어느샌가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걸 느꼈고 저항해보려 했지만 이미 늦은 때였다.

툭툭

누군가 나를 옆에서 친다.
속으로 생각한다.
아 뭐야..

계속 툭툭 친다.

"아 뭐야!!"

나는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이런 젠장.
교실이 형광등불로 환하다.
모든 학생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시선집중.
이런 시선은 아주 오랜만이다.
그 애도 오늘 수업에 들어왔다. 나를 자리에 앉아서 나를 동그랗게 뜬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괜찮니?"

부끄러움에 회끈거리는 감추어지지 않는 얼굴을 감추려고 하며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선생님이 계셨다.

"네네.. 넵. 괜찮습니다아앗.."

교실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래. 좀 일찍일찍 자렴."

얼굴이 더 붉게 달아오른다.

선생님은 내 자리를 떠나시면서 오늘 진도를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풀썩

자리에 앉았다.

하아...
쪽팔려서 그 날 내내 아무말도 안 하고 책만 열심히 바라봤다.

딩댕동

하교 시간이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간 걸까...
한번 창피하면 그 여운이 오래 남아서
오늘은 집중도 못한채로 시간이 다 흘러가버렸다.

크흑
잠깐 잔다는 게 대체 왜...
요즘 잠이 많아져서 탈이다.

집으로 걸어가는 길, 그 애가 먼저 교실을 나가는 걸 보고 빨리 따라갔지만
어쩜 그렇게 잘 뛰는지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다.
하교 시간 이후에는 아무도 말 걸지 않고 아무도 따라오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씻지도 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그냥 침대에 몸을 내동댕이 친다.
낮에 있었던 일 때문인지 왠지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다.
휴대폰을 켜고 하루 일과를 정리한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 애는 혹시 날 피하고 있는 게 아닐까?

어쩐지 학교 끝나고는 한번도 본 적이 없고
가끔씩 눈이 마주칠 때마다 인사하는 게 전부.
아무리 낯을 가린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만나기가 힘들 수가 있을까 싶다.
그동안 내가 눈치가 없었어서 못 알아챈걸까..

내일부터는 그래도 주말이니까 힘 내야지!

3화

다음 날이 되었다.
나는 지금 공원 벤치에 앉아있다.
오랜만에 도시에 온 후로부터는 잘 차지 않았던 할머니의 고동색 목걸이를 목에 걸고.
이곳은 사람이 그렇게 많이 다니지 않기 때문에 생각을 정리할 때는 여기 오랫동안 앉아있는 편이다.
바람이 분다.
절대로 가시지 않을 것 같았던 무더위는 어느새 시원한 바람으로 바뀌었고
푸르고 풍성한 나뭇잎으로 그늘이 되어 주었던 나무는 이제 앙상한 가지와 몇 개의 잔나뭇잎 만을 매단채로 머리 위에서 연약하게 흔들리고 있다.

그렇게 또다시 잡생각에 잠겨있던 와중
누군가가 다가왔다.
그 아이였다.
세상에! 이 얼마나 운명적인 만남인가

"여.. 여긴 대체 어떻게?"

"그냥 지나가다가 와봤어.
여기 조용하고 한적하니 좋구나.
너는 뭐하고 있었어?"

"나.. 나는..."

좋아하는 애 앞에서라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나는 말이야.."

그런데 말을 하다 말고 아이를 슬쩍 올려다보았는데
정말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아닌가!
내 목에 걸린 목걸이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귀신을 본 마냥..

"저.. 저기 왜 그래?"

"너 이게 뭔지 알아?"

"뭐? 혹시 목걸이 말하는 거야?"

"그래! 목걸이! 그거
그건..."

아이는 갑자기 언성을 높이더니
이내 고개를 떨구고 말 끝을 흐렸다.

"미안해.. 나는 이만 가 볼게."

"자.. 잠깐!"

돌아서는 그 아이의 등 뒤에 대고 나는 크게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좋아한다고..

하지만 입이 움직여지질 않았다.
너무 오랫동안 봐오기만 해서
이렇게 먼저 말 걸어주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
지금 이렇게 만났는데 떠나가면 한동안, 아니 아주 오랫동안 또 바라보기만 해야할 것 같았지만...
도무지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나는 확 돌아서 뛰어갔다.

"야야, 잠깐만! 어디가는 거야?"

그 애가 다급하게 나를 부르는 것을 무시하고는 냅다 뛰었다.

그러고 보니까 그 애는 왜 목걸이를 눈여겨 봤던 걸까?
하는 것이었다.
그것만이 이상하게 뇌리에 남아 나를 계속해서 생각하게 만들었다.
분명히 장식이라곤 없고 볼품없는 목걸이인데.

나는 그 사건 이후 목걸이에 대해 다시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자세히 알아보고자 보석상을 들렸다.
뉴튼 보석상. 우리집에서 15분쯤 걸어서 번화가 거리로 가면 있는 가게다. 30년째 어떤 할아버지가 운영하고 계신 곳이라고 한다.
나는 이곳을 방문했다.

딸랑

문에 달린 자그마한 방울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울린다.
들어가보니 어떤 중년의 아저씨가 앉아계셨다. 머리가 약간 히끗히끗하긴 하셨지만 그래도 내가 가끔 지나다니면서 보던 주인 할아버지는 아니었다.
처음 본 사람을 이렇게 평가하는 건 좀 실례인 것 같지만 그래도 솔직하게 쓰자면, 아저씨의 얼굴에서는 교활하고 노련한 사기꾼의 느낌이 묻어났다.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고는 목걸이를 건내드렸다.

"어때요?"

"음
이건!"

"뭔데요?"

"그냥 돌이야."

이렇게 말하고 아저씨는 목걸이를 내 손에 다시 내려놓았다.

"색깔이 살짝 이상해보이기는 한데,
내 판단으론 아무 가치도 없어 보이는구나.
어디서 장난감 뽑기라도 했니?
여긴 그런 거 취급하는 곳이 아니란다."

아저씨는 탐탁치 못한 말투로 말하고는 덧붙였다.

"그나저나 네 나이 또래에게 굉장히 돋보일 만한 목걸이 하나를 알고 있는데
혹시 관심 있니?
네가 딱 들어올 때부터 너한테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만한.."

"됐어요. 안녕히 계세요."

그렇게 말하고 나는 가게를 뛰쳐나가려 했다.
그 순간 누군가가 나를 조금은 거칠게 붙잡았다.

"그 목걸이. 내가 사겠네."

어떤 나이 드신 할아버지였다.

"아이고 아버지. 여긴 또 왜 나오셨어요?"

"왜 나오다니! 내가 지난 30년동안 운영해온 내 가게인데. 사장인 내가 왜 나오면 안되는 거냐?"

아저씨는 벌레 씹은 표정을 지었다. 이제보니, 할아버지가 이 보석상의 본래 주인이었는데, 아들이 물려받았거나 아니면 할아버지가 몸이 편찮으셔서 아들에게 가게를 맡기고 계신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덧붙였다.

"아가씨. 내가 그 목걸일 사겠어요. 얼마면 되겠수?"

"저.. 저는 이 목걸일 팔 생각이 없어요."

나는 그 말을 하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가게 주인 할아버지는 내가 팔 생각이 없다고 하자, 갑자기 엄청나게 높은 금액을 부르는 것이 아닌가!
내가 지금껏 일반인의 입에서 들어본 액수 중 가장 많은 액수였다.

"제발 나한테 팔아요."

"안돼요. 이건.."

"액수가 적어서 그런가요?"

그리고 할아버지는 아까 부른 가격의 두 배를 불렀다.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내가 여기 온 이유를 서둘러 말했다.

"혹시, 이 목걸이가 어떤 건지 알고 계시는건가요?"

"그래요. 아버지. 이게 대체 뭔데 그러시는데요?"

아저씨도 동참했다.

"말해드릴 수 없어요. 나한테 팔기 전까진."

"아버진 참 고집불통이시라니깐."

"넌 가만 있어라. 아무것도 모르는 게."

할아버지는 냉담하게 말한 후 나에게 다시한번 간청했다. 목소리가 아주 냉온을 왔다갔다 했다.

"제발 나한테 팔아요."

"죄송합니다. 아.. 안녕히 계세요."

나는 매우 당황한 채로 가게를 빠르게 뛰쳐나왔다.

이튿날 학교,
나는 여전히 목걸이에 대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
선생님이 부르시는 줄도 모르고.

"자, 누가 이 질문에 답해볼 사람? 네보레?"

"보레야?"

툭툭

짝꿍이 나를 툭툭 친다.

"네?? 넵!"

"질문에 답해보겠니?"

"질문이 뭐죠?"

수업에 딴 생각을 하고 질문이 뭐냐고 물은 아주 당돌한 이 학생에게 착한 선생님은 부드럽게 말씀해주셨다.

"지금은 생물학 시간이야. 우리는 지금 바다 속에 오랫동안 살았던 물고기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어. 혹시 살아있는 화석이라고 불리는 연골어강 어류를 대표하는 물고기가 무엇인지 기억하니?"

"저.. 상어입니다."

선생님은 놀랍다는 듯 순간적으로 눈썹을 치켜 올리셨다.

"정답이다."

"보레는 물고기에 대한 건 정말 잘 아는구나. 저번에도 잘 맞추더니.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반가운 학생이야."

선생님의 저 말은 틀렸다.
나는 그저 할머니가 어릴 때 해주시던 상어 호수 이야기 때문에 호기심이 생겨서 상어가 나오는 책만 골라봤을 뿐이다.
다른 물고기나 바다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저번에도, 그리고 이번에도 정말 우연히 상어와 관련된 질문을 선생님이 나에게 하셨을 뿐이다.

딩댕동

쉬는 시간이다.
그런데 심상치 않은 기운이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오오오.
아름다운이여 그대의 얼굴에 근심이 보이는구나."

우리반에서 이상한 것에 몰두하기로 유명한 어떤 아이다.

"뭐냐. 또."

평상시에 가끔 저런 말투로 아무에게나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곤 하는 애였기 때문에
나는 시큰둥한 말투로 말했다.

"아니 그냥 네 얼굴에 근심이 보이는 듯해서."

아이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 순간 머리에 스치는 생각.
문득 이 애라면 이상한 것들을 많이 아니까 혹시나 목걸이에 대해서도 알 수고 있지 않을까?
좀 이상한 애긴 하지만 그래도 나쁜 아이는 아니니까..
그렇게 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할머니한테 유품으로 받은 목걸이가 하나 있는데
어떤 친구가 관심을 보여왔어.
꼭 이 목걸이에 대해서 잘 아는 것 같이.
내가 보기엔 장식도 없고 색도 칙칙한 고동색이라서 별 가치가 없어 보였고
혹시나 전문가가 보면 나을까 싶어서 어젠 보석상도 갔었는데.
보석상에서도 아무 가치가 없어 보인데.
음 어떤 할아버지가 좀 사고 싶어하시긴 했지만..
그래서 지금 그 목걸이에 대해서 생각 중이었어."

목걸이로 인해 일어난 일련의 이상한 사건들은 일단 접어두고 이야기하지 않기로 했다. 그랬다간 또 이상한 아이 취급을 받을지도 모르니까.

"으으음.
느낌이 와.
느낌이!
뭔가 구미가 당기는걸.
여기 뭔가가 있는 게 분명해.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을거야!"

그 애는 흥분한 듯이 말했다.

"내가 그 목걸이 한번 볼 수 있을까?"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래.
대신 조심해서 봐야 해.
할머니가 잘 간직하라고 하신 물건이거든.
허튼 생각 할 생각 마."

"아 그럼 그럼.
당연하지."

나는 가방 안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목걸이를 꺼내서 보여줬다.

"어때?"

"으으으으으으으음."

아이는 긴 신음 소리를 내며 한참을 고민하면서 목걸이를 한동안 이리보고 저리보더니 갑자기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한테는 단서가 더 필요해!"

"응?"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너도 역시 별로 알 수 있는 건 없는거지?"

"응.. 사실 이것만 봐선 모르겠어.
근데 내가 얼마전에 신문에서 읽은 기사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물건인 줄 알고 버렸는데
그 물건이 생각보다 엄청난 물건이었다는 글을 읽었거든?
그 물건이 뭐였는줄 알아?
귀걸이였어.
정말 운이 좋게도 누군가가 쓰레기장에 버려진 걸 뒤지다가 발견했다더라.
가치가 엄청난 보물이었대.
너같이 분명히 여러 사람한테 찾아갔는데도 별 가치를 몰랐던 그 물건이
알고 보니까 엄청난 보물이었던 거야.
그걸 알게 되기까지도 시간이 많이 걸렸대.
온갖 고대 문서를 다 뒤지다가 그 물건이 엄청 오래 전에 살던 어떤 여왕의 것이었다는 걸 알아냈다고 그러더라고.
지금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어.
뭐 진품은 어딘가에 숨겨두고 모조품을 전시해뒀겠지만
보석상에서 만난 할아버지가 관심을 가졌다고 했지?
그럼 혹시 이 목걸이도 모르잖아?
뭔가 엄청난 보물일지도!
우리 한번 단서를 모아보자고!
그 목걸이 할머니 유품이랬지?"

"응."

"엄청 소중히 간직하라고 하셨던거고?"

"그러셨어."

"그럼 일단 할머니와 관련된 사람한테 목걸이에 대해서 한번 물어봐.
언제부터 가지고 계셨고
혹시 누가 준 건지 알고 계시면 더 좋고."

"근데 네가 말해준 그 기사에서
고문서를 뒤져가면서 겨우 알아낸 거라고 했잖아.
우리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한번 해보는거지 뭐!
재미로!
도전해봐야 나쁠 건 없잖아?
언제든 관둬도 되고.
한번 시도라도 해보는거야.
응??"

"일단 알았어."

그 애의 빛나는 눈을 그냥 무시해버릴 수가 없었다.

아이는 내가 대답을 하자마자 말했다.

"나는 일단 도서관 가서 목걸이에 관련된 자료들을 한번 찾아볼게.
나 도서관 VIP야.
사서님이랑 라인도 있다.
오래된 책들도 남들보다 은밀하게 더 빨리 접근할 수 있다고.
후훗
분명히 재밌을거야!"

"알았어!"

4화

나는 얼떨떨한 느낌으로 집에 돌아왔다. 그 아이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차마 생각을 다 정리하기도 전에 아이에게서 문자가 왔다.

'혹시나 네가 누구한테 뭘 물어봐야 할지 모를 것 같아서 문자한다.'

그리고 바로 다음 문자가 왔다.

'너희 할아버지에 대해 한번 알아봐.'

내 할아버지? 갑자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람.

'할아버지는 너무 예전에 돌아가셨다는 것 빼고는 모르는데.' 나는 이렇게 답장을 했다.

'언제쯤 돌아가셨는지는 알고? 혹은 어디에 살고 계셨는지. 생전에 뭘하시던 분인지. 이런 거 말이야. 목걸이나 귀걸이 같은 건 주로 연인이 나누는 선물이잖아. 그러니까 그 목걸이는 너희 할아버지가 할머니께 선물해주신 걸지도 몰라. 일단 뭔가를 알고 싶으면 아주 단순한 것부터 생각해가면서 주변인들에 대해 아는 것도 중요해. 너무 모호해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의외로 단서는 이렇게 나오기 마련이거든.'

그러고보니 난 참 내 가족에 대해 잘 몰랐구나 싶긴 했다.

'알았어'

'건투를 빌어!'

우리의 문자는 그렇게 끝났다.

다음 날, 나는 엄마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엄마, 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어요? 그러니까 엄마의 아빠요. 이런 말 해도 괜찮으신가요?"

"그럼 당연히 괜찮지! 근데 네가 이런 거 묻는 건 처음이라 살짝 의아하긴 하네."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잠시 생각하시다가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음.. 사실 너희 할아버지는 엄마도 너무 어릴 때 돌아가셔서 그렇게 자세한 기억은 없어. 내가 기억하는 거는 네 할아버지는 자동차나 배에 들어가는 모터 만드는 기술자셨고 그래서 엄마 어릴 적에는 차고에 온갖 부품들이 가득했다는 거? 항상 가만히 앉아 있다보면 어디선가 두들기는 소리랑 불쾌한 기름 냄새가 많이 났었어. 그래서 네 할머니께 어디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말씀드리면 할머니는 얼른 차고로 달려가셨고, 그제서야 네 할아버지는 뭔가 만드는 걸 잠시 중단하셨지. 네 할아버지는 정말 차고에 오래 처박혀 계셨단다. 예전에 살던 시골 할머니 집 차고 알지? 거기야. 우리가 할머니랑 살고 있을 때는 할머니 옛날 물건들이 정리 안된채로 차고에 꽉꽉 채워진채로 있었잖아. 기억하니? 네가 한번은 그 잡동사니들이 뭐가 그렇게 궁금했는지 들어갔다가 갇혔던 적도 있는데. 용감하기도 하지. 그것도 혹시 기억 나니? 흐흐흐 그때 거기 갇혀서 울상 짓는 네 표정이 정말 귀여웠단다. 여기 어디 보면 사진도 있어. 잠깐만 기다려 봐. 금방 찾아줄테니까."

그러면서 엄마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서랍장을 뒤지기 시작하셨다.

"엄마!"

"아, 여깄다!" 엄마는 정말 기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사진의 아이는 붉은 얼굴이 너무 울어서 퉁퉁 불어 있었다.
정말 서러워 보였다.

"너무 귀엽지 않니? 정말 사랑스러워. 우리 애기이"

"..."

"근데 언제 이렇게 컸니.."

좀 감상에 젖은 말투다.
엄마는 옛날을 생각하시는지 한동안 눈을 감고 가만히 계시다가 이내 말을 이어나가셨다.

"할머니랑 할아버지는 결혼하시고부터 거기서 쭉 사셨어. 지금도 그 집이 거기 있을지는 잘 모르겠구나. 참 추억이 많은데."

"그러실 것 같아요. 엄마 어릴 때부터 저 생기고, 할머니 돌아가시기 전까진 쭉 사신 거니까요."

"맞아."

엄마 눈에 약간 눈물이 고인 것 같았다.

"근데, 할아버지에 대해서는 갑자기 왜 물어보게 된거니? 가족에 대해 좀 관심이 생긴거야?"

"어.."

나는 잠시 목걸이에 대한 걸 떠올렸다.

"사실은요. 할머니가 저한테 목걸이 주신 거 혹시 기억하세요?"

"응? 할머니가 목걸일 주셨었어?"

"네.."

"아니, 난 왜 모르고 있었지? 아니면 잊어버린 걸 수도 있겠다. 요즘 사실 너무 바빠서 많은 것들을 잊어버리고 있거든. 아무튼 계속해보렴."

나는 자초지종을 엄마에게 다 말씀드렸다.

"이 목걸이를 할머니가 소중하게 간직하라고 하면서 주셨는데, 보석상까지 가서 물어봤는데도 별 가치는 없다고 해서요. 그냥 별 것도 아닌 것을 그냥 주신 걸까요?"

엄마는 목걸이를 여기저기 돌려보니 말씀하셨다.

"음.. 글쎄.. 사실 네 할머니는 비밀이 좀 많은 분이셨어. 무척 쾌활하셨고 또 많은 얘기를 하셨지만 딸인 나한테도 숨기는 사실들이 좀 있으셨거든."

"그래서 내 생각엔 말야. 아무 생각 없이 소중히 간직하라고 하셨을 것 같진 않아. 뭔가 숨겨져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하는구나. 뭐 그게 너희가 생각하는 것만큼 대단한 건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일단은 한번 계속 알아보렴. 필요한 것 있으면 말하고. 내가 도와줄게. 무엇보다 재밌을 것 같구나. 학창 시절에 한번쯤 이런 일 해보는 것도 나쁜 것 같지 않아."

문득 엄마가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니까 드는 생각이 있었다.

"엄마 그러면, 저 이번 주말에 한번 옛날 할머니 집이 남아있는지 시골로 내려가봐도 될까요?"

"그래 그러자! 나도 그 집이 아직 거기 있는지 보고 싶구나. 예전에는 그 집에 있다 보면 할머니가 계시던 게 괜히 생각이 나서 힘들었는데, 지금은 네 말을 들으니 다시 가보고 싶어. 그럼 이번주 토요일에 가는 거다!"

"네!"

평상시 엄마가 너무 바빠서 잘 얘기를 못해서 사이가 많이 서먹해졌었는데, 짧았지만 얘기를 나눈 것을 통해 좀 더 가까워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5화

그로부터 사흘 뒤, 아직 엄마랑 할머니의 옛 시골집으로 가보기로 한 토요일이 되기 하루 전이다. 나는 지금 아이의 집에 와 있다.
할아버지에 대한 걸 엄마한테 물어보고 정보를 다 들은 후로 바로 문자를 아이에게 보앴는데 어제까지 아무 답장도 없다가 사흘째 되는 날인 지금 갑자기 자기 집으로 초대하는 문자를 보내서 온 것이다.
자기가 알아낸 게 있다고 한다.

집 거실에 이제 막 앉았을 때 아이는 말했다.

"한동안 학교 끝나고 나서는 계속 도서관에서 살았어. 답장 못 줘서 미안. 책 보느라 바빴거든."

"괜찮아."

내가 대답했다.

"여러가지 책을 읽으면서 이것저것 알아보는데. 갑자기 사서님이 굉장한 책을 찾아주시더라."

그러면서 아이는 두꺼운 책 한 권을 바닥에 탕 하고 내려놓았다.
제목은 이랬다.

'이 세상 모든 목걸이의 종류'

이런 책은 대체 어디서 찾은건지..

"이 책을 빌려서 누가 연구한 적이 있는지 중간중간에 글에 해당하는 목걸이 사진도 들어있더라? 본래는 글만 빼곡한 책이거든. 먼저 이 책을 보고 연구한 사람에게 감사해야겠어. 덕분에 엄청 쉽게 여러 가지 목걸이를 금방 알아볼 수 있더라고."

"네 목걸이는 모양이 둥굴잖아?"

"둥근 목걸이에 대한 내용은 1024 페이지부터 나와. 종류가 602가지가 있는데, 내가 밤을 새서 이 중에서 가장 모양도 비슷하고 묘사도 유사해보이는 걸 3개 찾았어. 한번 봐봐."

나는 아이가 가르킨 부분을 유심히 보기 시작했다.
과연 빽빽하게 들어찬 글씨 사이로 우표보다 아주 약간 더 큰 사진이 끼워져 있었다.

"이것만 가지고는 잘.."

"한번 잘 봐봐. 이럴 때 필요한 게 돋보기야. 내가 네 것도 준비해놨어."

"음..."

나는 돋보기를 들고는 아이가 찾아놓은 3개의 다른 목걸이 사진들을 유심히 보기 시작했다.

"보다 보니 내 목걸이랑 비슷해보이기도 하고.. 근데 솔직히 세 개 다 비슷해보이는데? 그래도 세번째 목걸이가 내 거랑 모양은 제일 똑같은 것 같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리고 이 사진에 보면 세 번째 목걸이는 색깔이 파란색이잖아? 네 목걸이도 파란색이고. 그러니까 이 목걸이랑 같은 거 아냐? 이 목걸이가 어디서 처음 시작된 거냐면..."

"잠깐만!"

내가 말을 끊었다.

"내 목걸이가 파란색이라고? 내 목걸인 고동색이야. 그럼 색깔로 보면 전혀 다른건데?"

"응? 고동색이라니? 내가 봤을 때는 파란색에 가까운데? 좀 어두운 파란색이긴 하지만."

"뭐라고? 그게 정말이야? 파란색?"

"응. 진짜야. 나 눈 좋아. 책을 많이 본다고 눈이 다 안 좋을 거란 건 편견이야."

정말 이상했다. 내가 할머니한테 어릴 때 이 목걸이를 받을 때부터 아주 분명하게 기억하고 또 지금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사실 중에 하나는 이 목걸이가 고동색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친구한테는 파란색으로 보인다고 하니까...

"아무튼 그럼 네 목걸인 파란색인 걸로 하고 이 세 번째 목걸이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부터 시작해보자고. 어디까지 말했더라? 그렇지. 이 목걸이가 어디서 처음 시작된 거냐면..."

나는 나지막이 말했다.

"파란색이 아니야."

아이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계속 뭐라고 말했다.

"흠. 이제 퍼즐이 맞춰지고 있어. 우린 사건의 중간 지점 태풍의 눈을 향해 들어가고 있어"

도통 뭔소린지..

"파란색 목걸이! 이 글에 있는대로 하면 될 것 같다."

"파란색이 아니래도!"

"아니야. 파란색이야. 너 내 눈이 지금 잘못되었다는거야? 내가 책이나 많이 보고 그래서 눈이 안 좋을거란거야?"

"그렇게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 그렇지만 이 목걸이는 고동색이 맞아.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고동색으로 기억하고 있었고 고동색 목걸이로 계속 가지고 있었던 거라고!"

"색이 변했을 수도 있잖아? 그리고 때로는 스스로가 보는 것이 다가 아닐 때도 있어. 남의 말도 좀 들어볼 줄 알아야지. 이 목걸인 암만 봐도 파란색이야."

"아니라니깐!"

우리는 목걸이가 고동색이냐 파란색이냐로 계속 옥신각신 싸웠다.
말싸움은 유치원생처럼 점점 더 유치해져만 갔다.
애초에 색깔로 싸운다는 게 유치한 짓이지만, 나는 색깔을 다르게 말했다는 것보다 아이가 나를 무시하는 것 같은 게 더 싫었다.
말이 어떻게 나왔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지만, 그 아이가 갑자기 뭔가를 증명하겠다며 망치를 들고 왔다.

"좋아! 그럼 내가 증명해 보일게. 이 목걸이를 깨면 너도 이게 파란색이라는 걸 알거야."

"너 미쳤어? 내 할머니 유품을 깨겠다고? 그것도 나한테 주신건데?"

"넌 이 목걸이가 파란색이라는 걸 확실히 알게 될거야. 두고 봐."

"하지마! 제발! 안돼!"

너무 늦었다. 온정신과 몸이 한껏 격양된 아이는 망치를 들고 목걸이를 있는 힘껏 내리쳤다.
그런데, 그 순간 매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딩!!!!!

목걸이를 내리치는 순간, 우리가 예상했던 깨지는 소리가 나는 대신 종을 쳤을 때처럼 크고 맑은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동시에 목걸이에서는 한 줄기 빛이 흩뿌려져 거실을 채웠다.
소리는 한번 크게 울린 이후로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더 커지면서 넓게 퍼져갔다.

"이게 뭐지..?"

아이는 이내 망치와 목걸이를 방바닥에 내던지고는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 소리조차도 곧 묻혀 버렸다. 소리는 계속해서 점점 더 커졌고 빛은 엄청나게 밝아지면서 아이의 비명소리를 완전히 먹어버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빛이 사라지고 목걸이에서 엄청나게 많은 물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 부분이 읽고 있는 여러분이 좀 뜬금없고 말이 안된다고 다고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일텐데, 정말로 엄청나게 많은 물이 흘러나왔다.
물은 마구 흘러넘쳐 거실을 가득 채웠고 우리는 물이 거실 천장 끝까지 채워지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는 정신을 잃었다.

6화

우리는 한동안 기절해 있다가 거의 동시에 일어나면서 같이 소리를 질렀다.

"그건 대체 뭐였지?" 내가 거의 울먹이면서 말했다.

"나야 모르지! 목걸이 주인은 너잖아."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지?"

"우리가 꿈 꾼 건 아닐까?" 아이가 말했다.

"이렇게 현실감이 있는 꿈 꿔본 적 있어? 그리고 아까 상황이 우리가 잠들만한 상황이었냐는거야! 아니잖아."

"그건 그래.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물에 잠겼었다면 지금 우리 옷이 젖어 있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옷은 물이 빠지고 시간이 많이 지나서 말랐을 수도 있지."

"그럼 우리 주위를 봐봐. 방에 물이 가득 찼다가 다시 사라졌는데 어떻게 물건들이 이렇게 제자리에 있을 수 있겠어?"

정말 그랬다. 물건들은 물이 잠기기 전처럼 전부 제자리에 있었고 모든 것은 그냥 평화로웠다.

"아니 그리고 애초에 그렇게 큰 물이 이렇게 작은 목걸이에서 다 흘러나오고 또 이렇게 완벽하게 없어졌다는 게 말이나 돼?" 아이가 의문을 제시했다.

"... 잘 모르겠으면 한번 더 해보든지."

"미쳤어? 그런 걸 또 어떻게 해"

"그래도 다시 알아보려면 다시 해보는 수밖에 없지."

"아니, 굳이 그럴 필욘 없을 것 같아. 그렇지만 이걸 통해서 알 수 있는 건 생각보다 이 목걸이가 훨씬 중요하고 뭔가 비밀스러운 힘이 숨겨져 있다는거야."

"마법 같은 것?"

"그래. 꼭 그런 것."

그리고 한동안 침묵.

침묵을 깨고 내가 먼저 입을 땠다.

"사실은 말야. 나 이 목걸이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고 있었어. 이 목걸일 예전에는 지금보다 더 많이 걸고 다녔었는데, 그때마다 이상한 일들이 생기곤 했거든."

"정말? 왜 나한테는 말해주지 않았어?"

"네가 나를 이상하게 볼까봐."

"사실 너도 이상한 아이라서 모르는지 모르겠는데
학교 애들 대부분은 나를 피해.
넌 그러지 않았으면 했어."

...

"이제라도 말해줘서 고마워.
설령 네가 먼저 그렇게 말했어도 난 널 이상하게 보지 않았을거야.
그리고 아까 널 무시하고 우겨서 미안해.
지금부터는 좀 더 여러 자료를 찾아보면서 더 잘 알아보도록 할게."

"나도 미안해."

"좋아 그럼!"

아이는 언제 그랬냐는듯 금새 회복되어 활기를 되찾았다.

"그럼 내일부터는 좀 더 세부적인 자료를 찾아보도록 할까!"

"그래 나도 일단은 네 말대로 자료가 더 필요하다는 것에는 동의해. 내일 나는 단서가 될만한 걸 찾으러 엄마랑 예전에 할머니랑 살던 시골집으로 내려가보려고 해. 그런 다음에는 나도 너랑 같이 다른 자료들을 가보도록 할게. 자료를 한 사람이 찾는 것보단 두 사람이 같이 찾는 게 낫잖아?"

"오오오 옛날 시골집이라니! 뭔가 단서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야.
건투를 빈다!"

"고마워."

그렇게 우리의 대화는 끝났다.

7화

"자! 여기야! 도착했어. 흐아 고향 냄새!"

엄마가 말했다.

치익..

타고 온 버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문명과 완전히 동떨어진 느낌이었다.
이곳은 인터넷이 안 된다...
이제 우리 앞에 보이는 건 풀과 나무와 흙길 뿐..

"자, 이제 1시간만 걸으면 돼!"

"네???"

"어라, 내가 미리 말 안해줬었던가?"

"네가 어려서 기억을 못하나 본데, 우리가 워낙 시골에 살아서 가장 가까운 버스 정류장이 1시간 거리란다. 그래도 지금쯤이면 시간이 오래 지났으니까 좀 바뀌었을 줄 알았는데 아직 그대로구나! 역시 고향이야!"

헐..

"버스는 묻에서 사는 사람들을 서로 연결해주는 교통 수단이잖니. 고향집은 땅과는 멀어도 바다랑은 가까워. 걸어서 5분거리에 바다가 있단다."

우리는 그렇게 그냥 걸었다. 그나마 가을이라 서늘한 바람이 불어서 다행이었다. 여름이었으면 말라죽었을 것이다.
나는 걸으면서 엄마랑 몇 가지 얘기를 나눴다. 그러다 어제 친구집에서 겪은 일을 엄마가 물으셨다.

"참, 어제 그 아이 집 간 건 어땠니? 뭐 좀 알아낸 거 있어?"

"어.. 그게요.."

아이와 말다툼을 벌이다 목걸이를 내리쳐 온 거실이 물로 가득찼고 그 안에서 허우적거리다 기절했던 이야기를 막 꺼내려고 했는데 망설여졌다.
엄마가 알면 왠지 이 모든 일을 그만두게 하실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엄마는 재밌는 일은 좋아하시지만 조금이라도 위험한 일이거나 애들이 하기에 부적절한 일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당장 그만두게 하시기 때문이다.
뭐 애초에 설명해드렸어도 안 믿으셨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그 애가 목걸이 종류를 많이 알 수 있는 신기한 책을 가져와서 그거 보면서 놀았어요."

나는 그렇게 얼버무렸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더 하다 보니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빠르게 걷게 되었고 1시간동안 걸어 도착할 곳을 45분만에 도착하게 되었다.

"자! 이제 거의 다 왔어. 저쪽 돌아가면 집이 보일거야."

"너무 오랜만이야! 집이 아직 거기 있을까? 어떻게 생각해? 있을 것 같니?"

"있길 바래야죠."

우리는 이렇게 말하며 모퉁이를 돌았다.

거기에는...

집이 있었다!
네모난 창문에 하얀 슬레이트, 노란 지붕, 그리고 옆에 차고까지
우리가 기억하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심지어 관리도 깔끔하게 되어 있었다.
흉가가 아니었다.
나도 기분이 좋았지만
엄마는 엄청나게 들뜨셨는지 엄청 호들갑을 떠셨다.

"우리가 나가고 누가 살고 있나봐!"

우리는 현관 앞에 도착해서는 조심스럽게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저희는...!"

엄마가 말하려는 것을 막고 내가 말을 시작했다.
엄마는 기분이 너무 좋으실 때면 이상한 말을 해서 사람을 당황시키는 일이 흔하기 때문이다.

"저희는 예전에 이 집에 살던 사람들인데요. 집이 너무 그리워서 한번 찾아와 봤어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잠시 집안을 구경할 수 있을까요?"

얼마 간의 침묵 후 새 집주인이 나왔다.

"들어오시죠."

우리가 들뜬 것을 감출 수 없는 표정을 얼굴에 가득 품고 들어가고 있을 때
집주인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언젠가 이 집에 사시던 분들이 한번쯤 찾아오실 줄 알았어요."

"이 집은 뭔가 묘한 느낌이 있거든요. 왠지 모르게 잘 관리해주고 보살펴줘야 할 것 같은 느낌이요.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서 사는 저도 좀 이상한 것 같아요. 가까운 버스도 1시간 거리고 택시도 안 다니고 편의시절에 주변 이웃도 거의 없는데.."

"집이 가진 힘에 매료된거죠 뭐."

그는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집을 어떻게 관리했는지를 아주 장황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사람이 한 말을 다 알아듣진 못했지만, 확실히 집은 매우 깔끔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그러다 엄마가 무언가를 발견하셨는지 환호성을 지르셨다.

"여기봐!!!! 우리가 살 때 쓰던 문패야."

'네보레'

우리 가족의 이름 성이다.

새 집주인은 또 신나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 그거요. 제가 잘 보관해두었죠. 이 집에 여러분이 안 사시는데 붙여놓긴 좀 그래서. 잘 때어놓았답니다. 성이 네보레인가요?"

"네 그래요. 저랑 제 어머니랑 제 아이가 전부 같은 성이랍니다. 저희 집안은 모계쪽 성을 따라서요."

"그렇군요."

전반적으로 집 안의 겉으로 보이는 물건들은 정말 우리가 살던 때와 비슷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집을 관리하는 분의 새로운 식기들과 전자제품, 그리고 몇 가지 책들이 좀 추가된 것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정말 겉으로는 추억이 떠올려지는 보존 상태를 가진 집이었다.
하지만 그 안의 다른 물건들은 누군가 도둑질 해갔는지 많이 없어져 있었다.
또 목걸이와 관련된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이 집을 말끔하게 관리한 새 집주인에게도 혹시 뭔가를 아는 게 없는지 나름 머리를 써가면서 물었는데 대답이 돌아오는 게 없었다.
새 집주인은 자기가 이 집을 이렇게 관리한 것은 이 집이 좀 흉가 같이 되었을 때라며 그 사이에 다른 것들은 모른다고 했다.
우리는 이곳저곳을 다 다니며 우리가 이 집에서 가졌던 추억거리를 이야기하면서 오후 시간을 보냈다.
우리가 추억을 이야기하면 관리인이 어떻게 관리를 했는지를 옆에서 졸졸 따라다니면서 이야기했다.
마지막으로 가볼 곳은 차고였다.

"앗, 잠시만요. 차고를 본 후에는 이제 가실 건가요?"

우리가 할아버지에 대한 언급을 막 하면서 차고로 가려고 하자 새 집주인이 말했다.

"네 그렇죠 뭐."

"제가 너무 열심히 설명하느라 손님을 대접하는 걸 잊어버린 것 같네요. 가시기 전에 차라도 한 잔 내오겠습니다."

그러자 엄마가 말했다.

"이렇게 저희의 추억어린 집을 깨끗하게 관리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이미 충분한 대접입니다. 그래도 차는 마시고 싶네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엄마!"

"그럼 너 먼저 차고에 가서 보고 있으렴. 우리는 잠깐 차를 만들고 있을 테니까."

"알았어요."

나는 그렇게 먼저 차고로 갔다.

8화

차고에 가까이 가자, 어떤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뭔가를 만드는 듯한 소리였다.
누가 차고에서 작업을 하고 있나?
집을 관리해주신 새 집주인 분은 혼자 사시는 것 같던데?

막상 가까이 가보니 차고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철문이었고 또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기 때문에 혼자 열긴 힘들어보였다.
아주 오랫동안 열어보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서 차나 마시고 어른들이랑 다시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뒤돌아 서는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차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 것이다.

어? 분명히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는데?

등을 돌려 차고를 보았는데, 거기에는 여러 가지 기계와 잡동사니에 둘러쌓인 청년 한 명이 있었다.

"저기.. 누구세요?"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청년은 말했다.

"나? 누군 것 같냐?"

싸가지 없는 말투였다.
내가 대답이 없자, 그가 대신 대답했다.

"그냥 기계공이지. 차고에 앉아서 이것저것 만지는.."

그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나를 보자 불을 껐다.

"더 얘기할거냐?"
"더 얘기하고 싶으면 차고 문 닫고 안으로 들어와라.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알려줄테니."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차고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진 않았다.

"그래서 뭘 하고 계시는데요?"

"지금은 배에 들어가는 모터."

말이 짧았다.

"선박에 들어갈 모터야. 예나 지금이나 뱃사람들 위해서 나같은 기술자가 이렇게 여럿 차고에서 썩는다고. 내 이전에도. 내 이후에도."

"언젠가는 진짜 나만의 회사를 차려서 멋진 기술들로 여러 기계를 만들어서 큰 회사들에 공급할거야. 지금은 이 차고랑 저 집의 방 한 켠에 하숙하는 신세긴 하지만."

"하숙생이셨군요. 어쩐지."

그는 만지고 있던 기계에서 눈을 때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기술은 있으세요?"

"당연하지! 저쪽에 내 노트 있어. 한번 구경해봐라. 너만 보여줄게."

나는 노트를 가져와서 펼쳐 보았다. 과연 여러가지 아이디어들이 들어있었다. 나는 기술이나 기계에 대해 잘 아는 바가 없어, 대충 봐서는 그것이 어떤 기술이며 심지어는 무엇을 하는 기계인지조차도 잘 알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꽤 굉장해 보였다. 그런데 내가 어느 페이지 이상을 보려고 하자, 하숙생은 갑자기 내가 노트를 보는 걸 막았다.

"어허, 꼬마야 안돼요. 거기부터는 내 비밀 공간이야. 뭐 대부분은 미래를 위해 남겨둔 거지만. 자, 이제 노트를 돌려줘."

내가 노트를 돌려주자, 그는 대충 바닥에다가 노트를 던져놓았다.
중요한 노트인 것치고는 너무 함부로 대하는 것 같았지만, 그는 지금 다른 곳에 집중하느라 그런 것을 신경 쓸 여지가 없는 것 같았다.
그가 바닥에 노트를 던지자, 자연스럽게 바닥으로 눈이 갔다.
바닥에는 아까 피우던 아직 꺼지지 않은 담배, 그리고 이전에 피웠던 담배꽁초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꽤 골초인 모양이었다.
불이 채 꺼지지 않은 담배를 보며 나는 말했다.

"저기, 웬만하면 담배는 끊으세요. 건강에도 안 좋고 혹시 결혼에 자녀 계획 있으시면 나중에 계속 피우시다간 아이한테도 안 좋아요."

하숙생은 한번 코웃음을 치더니 말했다.

"너 어지간히 오지랍이 넓구나. 남이 어떻게 하든 뭔상관이니."

"그래도 일리가 있는 말인 것 같긴 하구나. 안 그래도 결혼은 하려고 하거든.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어. 이번주에 결혼에 대한 생각을 물어보려고 해."

"우와! 멋지시네요. 저도 사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아직 고백은 못했어요."

"오! 우리 같은 처지구나."

"타이밍이 좋을 때 빠르게 하렴. 사랑에서 진정한 실패자는 고백에 성공하는 것도 실패하는 것도 아닌, 고백을 안 하는 사람이야."

"네, 기억할게요."

"좋아!"

그리고 그는 품 안에서 담배를 꺼내려고 했다.

"앗차!"
"안 피워야지. 참."
"너 내 프로포즈용 선물이나 구경할래?"

그러면서 그는 기계 만지는 것을 멈추고는 차고 구석에서 어떤 붉은색 상자를 가져왔다.

"자, 이거야."

상자를 열어보니 거기에는 목걸이가 들어있었다.

"네가 보기에 어떻니? 마음에 들어 할까?"

그런데 이 목걸이를 찬찬히 들여다보던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목걸이가 할머니가 나에게 주신 유품과 똑같이 생긴 것이 아닌가!
우연이라고 하기엔, 잘못 본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똑같았다. 조금 더 새 것이라는 것만 빼고는.

"이 목걸이.. 혹시 어디서 사셨어요?"

"어디서 샀냐고? 샀다니! 내가 직접 만든거야."
"좀 섭섭한데. 아니지, 산 것처럼 보였다고 하니까 잘 만들었다는 칭찬인가?"

그렇다면.. 설마..

막 그에게 무언가를 더 물으려고 할 때
갑자기 차고 문이 활짝 열렸고 어두운 창고로 빛이 훤히 들어왔다.

"여깄었구나!"

"우리가 얼마나 찾았다고!"

엄마와 새 집주인이었다.

"저는 여기에서..."

나는 뭐라고 설명을 하려고 했지만 차고 문이 열리자마자 하숙생과 여러 기계 장치들은 다 사라져버렸다.

"아니, 근데 대체 여긴 어떻게 들어간거야? 우리가 자물쇠가 잠겨 있어서 풀었는데. 너 요즘 마술쇼 같은 거라도 준비하니?"

엄마가 말했다.

"아뇨.."

"여기서 지난 1시간동안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1시간이요?"

"그래!"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지났다는 것을 안 나는 놀랐다.

"그래도 찾아서 다행입니다. 뭐 그냥 이 안에서 놀고 있었겠죠."

떠벌리기 좋아하는 새 집주인은 그러면서 이어서 말했다.

"차고는 느낌이 신기해서 그대로 뒀었습니다. 자물쇠로 잠겨 있기도 했고요. 근데 차고 구멍을 통해 보니 그냥 비어있더군요. 아주 깔끔하게요."

"흠.. 저희가 나올 때는 꽉 차있었는데요." 엄마가 말했다.

"아마 누가 고물상에 다 팔아버린 모양입니다."

"저기요.."

내가 말했다.

"그럼 여기 있는 건 뭐죠?"

내가 손으로 집은 것은 아까 전에 봤던 노트다.
이 노트만은 다른 것들과 사라지지 않고 여기에 남아있었다.

"엥? 이런 게 있는 줄은 몰랐네요. 뭐 저는 창고 구멍을 통해 눈으로 대충 본 거니까요. 필요하시면 가져가세요. 창고는 열어본 적이 없으니까 제 물건은 아닐겁니다."

"이제 그럼 저희는 집을 다 봤으니, 그만 가볼게요. 정말 너무 깔끔하게 관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도 감사하단 말씀 드리렴." 엄마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허허, 별말씀을요. 가끔 놀러오세요. 놀러오기에 좀 먼 거리긴 하지만요."

우린 그렇게 새 집주인의 배웅을 받고는 다시 1시간을 걸어 버스를 타고 집으로 왔다.

집으로 오는동안 우린 서로 별로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아니, 사실 엄마는 좀 나에게 말을 거시려고 했는데, 내가 생각이 복잡해져서 말을 하지 않은 것이다.

집에 오자마자 나는 모든 생각을 빠르게 정리하고 친구에게 모든 일들을 다 정리해 문자로 보냈다.

"굉장한 단서들을 얻었어."

9화

문자를 받은 친구의 반응은 예상대로 폭발적이었다.
엄청난 양의 흥분해서 아무렇게나 쏟아내는 말들을 다 걸러내고 좀 이성을 되찾은 후에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그 노트. 하나도 손대지 마. 나랑 같이 보자.'

내용이 궁금했지만 여기까지 온 것도 이 친구가 처음에 호기심을 가지게 도와준 것도 있으니 기다리기로 했다.
친구는 월요일에 우리집으로 찾아오기로 했다.

띵동

"누구세요?"

엄마가 말했다.

"저 그 아이입니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누구 마음대로 어머님이니!"

엄마는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문을 열어주셨다.

"후후. 우리 아이가 이제 이렇게 다른 아이도 집에 데려오다니. 엄마는 참 감동스럽구나."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엄마가 간식 준비해줄테니까 편히 있으렴."

엄마는 콧노래를 흥얼거리시면서 부엌으로 가셨다.

부엌으로 완전히 들어가신 걸 확인하자마자 아이는 나에게 질문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너 네 할아버지를 만난 게 진짜야? 그 차고에서?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지?"

"그러니까 말야! 나도 실감이 안 나."

"아무래도 이 목걸이가 나를 순간적으로 과거로 데려간 것 같아."

"근데 목걸이를 할아버지가 만드신 거라고?"

"응. 이제 모든 게 확실해졌어."

"그럼 내가 찾은 그 목걸이에 대한 책은 다 헛수고였네. 직접 만든 거라니!"

"아니야. 그래도 네가 나에게 호기심을 준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그럼 이제 그 노트를 천천히 보면서 단서를 찾아보자!"

우리는 노트를 바닥에 펼쳐놓고는 둘이 나란히 앉아 노트를 한 장 한 장 넘겨보기 시작했다.
몰랐는데, 이 친구는 기계 덕후였다.
내가 무엇인지 몰랐던 그림들을 다 이해하고 나에게 하나하나 설명해주었다.
그 모습은 아주 열정에 가득차 보였다.
어떤 이가 이토록 어떤 것에 몰입하고 열정을 가득 실을 수 있다는 점이 사뭇 멋있어 보였다.
엄마는 그러는동안 우리를 방해하지 않고 문 틈으로 흐뭇하게 지켜보셨다.
내가 모를 줄 알았겠지만, 나는 엄마가 다가오는 그 특유의 느낌을 매우 직감적으로 잘 느낀다.

"자, 이제 우리가 정말로 궁금해서 보고자 했던 부분이야."

"비밀 공간."

우리는 동시에 말을 했다.

"자, 넘긴다."

아이는 갑자기 뜸을 들였다.

"음. 아니야 네가 넘겨."

"아니야, 네가 넘겨."

"그럼 우리 둘이 같이 넘기자."

"하나, 둘, 셋!"

???

백지였다.
다음 장, 또 다음 장을 넘겨봐도 백지.
어떤 글도 쓰여 있지 않았다.

"너희 할아버진 참 뻥을 잘 치시는 분이구나."

"아니 분명히 미래를 위해서 많은 장을 남겨두셨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써진 게 있다는 느낌이었는데?"

"아무튼 아쉽게 되었어. 그래도 우리는 한 50년 전에 살던 기계공이 이 목걸이와 관련되어 있다는 건 알게 되었잖아. 또 이 스케치들은 무척 멋있고. 이제 그런 쪽으로 또 찾아봐야지."

아이의 목소리에서는 되게 기대했던 부분이 사라진 것에 대한 실망감이 감추어지 않았지만, 그래도 애써 좋아보이려고 애쓰는 듯 했다.

아이는 그렇게 조금 더 있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늦은 밤,
나는 빈 노트의 공간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엄청난 단서를 구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림이랑 할아버지가 나중에 할머니랑 살게 되는 집에 오래전부터 하숙하셨던 하숙생이자 기계공이셨다는 거. 그리고 담배를 피우셨다는 것 빼고는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더군다나, 목걸이도 어떤 고대의 것이 아니라 할아버지가 직접 만드신 거였다는 건, 더더욱 맥이 빠지게 했다.
더이상 어떤 연관성도 찾기가 힘들어졌으니까.
그럼 목걸이가 가지고 있을 때 생겼던 이상한 일들은 다 어떻게 된거지?
이렇게 생각하면서 턱을 괴고 있을 때
또다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일기장에 글씨가 써지고 있었다.
글씨는 써지는 즉시 엄청나게 예전에 쓰인 것처럼 되었지만
그래도 글씨는 하나하나 써지고 있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그 희한한 광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윽고, 글씨가 써지기가 그쳤고
나는 첫 번째 일지를 읽을 수 있었다.

첫 번째 일지

별 것 아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써보려고 한다.
살아오면서 기계만 만진 내가 무슨 글재주가 있으랴.
그래도 기록하는 습관은 나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불쏘시개가 된다 한들, 한번쯤은 써볼 가치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지금껏 기계 설계만 그려왔지만 지금부터는 글을 써보려 한다.
이게 다 그녀를 만나고 나서부터다.
그녀는 나의 삶을 변화시켰다.
주로 그녀에 대해 쓸 것이다.

나는 다음장을 넘겼다.

두 번째 일지

그녀에게 청혼하려고 한다. 목걸이를 직접 만들었다.
목걸이의 가운데는 비워두었다.
그녀가 기뻐해줄까?

그리고 얼마 뒤, 두 번째 일지 끝에는 급한 글씨체가 추가되었다.

오늘 이상한 일을 겪었다.
차고에서 늘 하던 일을 하던 도중 어떤 꼬맹이가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내 곁에서 담배를 끊으라는 둥, 하다가 그녀에게 줄 목걸이를 보여줬는데,
목걸이를 보고는 사색이 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나는 귀신을 본 것일까?
귀신인 것치고는 너무 따뜻하고 또 자상한 아이였다.
어쩐지 가까운 느낌이 들었던 것은 그 아이와 내 처지가 비슷했기 때문일까?

세 번째 일지

집을 샀다.
내가 하숙생으로 지내던 집이다.
도무지 기계를 만지며 익숙했던 차고를 떠날 수가 없다.
이 집에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다.
그녀도 이 집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또 바닷가랑 가깝기도 해서 왠지 모험심을 불러일으킨다.
이제 그녀에 대해 써본다.
그녀는 초콜릿 쿠키를 좋아한다. 우리가 처음 만나던 날, 내가 근방의 베이커리에서 사준 초콜릿 쿠키를 먹던 그녀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마치 초콜릿 쿠키라는 걸 처음 먹어본 듯한 얼굴이었다. 어찌나 맛있게 먹던지.. 이젠 아예 자기가 직접 만들어 보겠다며 재료를 사와서 굽고 있다. 온 집안은 요새 달달한 초콜릿 냄새로 가득차고 있다. 아니, 솔직히 달달한 냄새는 아니다. 타는 냄새다. 베이킹을 하긴 하는데, 잘 하진 못한다. 쿠키가 매번 새까맣게 매번 타서 나오기에...
그녀는 그럴 때마다 다음번엔 더 괜찮아질 거라고 유쾌하게 말한다.
그래, 지금은 많이 나아진거다. 처음에는 쿠키가 다 익지 않아서 묽은 반죽 맛만 났다.
오 신이시여, 그녀가 아래층에서 날 부르고 있다. 쿠키를 맛 봐야 할 시간이다. 부디 저에게 은총을 내려주소서..

이어서 네 번째 일지

네 번째 일지

그녀가 아이를 가졌다. 그녀는 어떤 아이든 상관 없다고 했지만 여자 아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내심 하는 것 같다. 나도 뭐 여자 아이가 좋다. 이러다 남아가 나오면 끝장인데.

다섯 번째 일지

네 번째 일지를 쓴지 많은 시간이 지났다.
아이는 꽤 많이 컸다.
엄마, 아빠를 말한지는 벌써 오래되었고
뒤집다가 기고 기다가 이젠 뛰어다닌다.
그런데 그녀가 슬퍼보인다.
가끔씩 생각에 잠겨 있다.
무슨 일이냐 물어도 대답을 피한다.
어떤 무거운 일인 것 같다.
요즘은 벽난로 앞에 자주 앉아 있는다.

여섯 번째 일지

나는 바다로 떠난다. 그녀가 드디어 나에게 입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안다. 그녀가 누구인지를. 다시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 떠난다.
그녀는 가지 말라고 하지만, 그녀가 내심 그곳을 그리워 하고 있다는 걸 안다.
나는 반드시 찾아내고 말 것이다.

그리고 일지는 끝났다.
그런데 한참이 지난 후 글씨 하나가 더 써졌다.

추신

비밀을 알고 싶다면 그녀가 가지고 있는 목걸이를 태양에 비춰보아라.
바리엘 절벽에서.

그 순간, 친구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저기, 내가 그.. 책을 찾아 봤는데. 파란색 목걸이라는 거 말이야."

"그건 아니였잖아."

"그래, 그래, 나도 알아. 그래서 그냥 비슷한 부분을 다 훑어 봤는데, 우리가 잘못 짚었다는 걸 깨달았어."

"뭘?"

"애초에 우리가 신경쓸 건 전체적인 목걸이가 아니라. 그 목걸이에 박힌 그 돌맹이였다는 걸."

"그걸 알게 되면서 찾은 게 있는데."

"음.."

친구는 뜸을 들였다.

"뭔데?"

"이건 전혀 과학적이거나 연구된 사실이 아니긴한데.. 너 혹시 인어에 대해 들어본 적 있어?"

"인어라니?"

"고대 신화에 보면 뱃사람들을 유혹해서 배를 가라앉혔다는 그런 전설 속의 인어들이 있거든."

"내가 읽은 신화 중에 하나인데 그 인어들이 가진 어떤 돌맹이가 우리가 겪었던 이상한 일들과 꽤 유사한 것 같아서. 내가 읽어줄테니 들어봐. 신화를 번역한 걸 읽는거라 말투가 좀 거창할 거야."

그들이 가진 진정한 힘은 그들의 구슬에서 나왔노라.
보라 구슬에서는 강한 파도가 나와 우리들의 배를 쳐부섰노라.
그들은 이 강력한 힘을 이용하여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갑자기 나타나기도 했으며,
선원들을 홀려 물로 뛰어들게 했다.
그들은 모습을 마음대로 바꾸기도 했다.

너희 할아버진 아마 인어들의 구슬을 목걸이로 만드신 것 같아.
이 신화는 어디까지나 신화기 때문에 걸러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중 다는 아니여도 몇 개는 너나 내가 경험한 이상한 현상들과 되게 유사하지 않아?

내가 이런 말을 하니까 좀 웃긴데.
인어들은 굉장히 오래 산데.
천년이 하루 같다고도 해.

아마 이런 대목을 너희 할아버지께서도 뱃사람들한테 들으시고는
사랑이 영원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목걸이의 재료로 사용하신 게 아닌가 추측이 돼.

10화

"자, 이제 마지막이야. 이 절벽 끝에서 목걸이를 태양에 비춰보면 비밀을 알 수 있다고 글에 적혀 있어. 절벽에서는 항상 조심해. 아차 하는 순간 떨어질 수도 있단 말이야."

"그래 알았어."

나는 절벽 끝으로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태양에 비추기 위해 빼고 태양빛이 잘 들도록 이 목걸이를 높이 들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는데 정말 놀랍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 이런 걸 믿은 내가 바보지. 나는 목걸이를 호주머니에 넣고는 태양을 등지고 아이에게 소리쳤다.

"자, 이제 다 끝났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잖아. 우리 이제 이런 바보 짓은 그만하는거지?"

그런데 그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갑자기 천둥이 치는 게 아닌가. 말 그대로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었다.
순간적으로 너무 큰 천둥 소리에 정신이 없을 때
엄청나게 큰 파도가 뒤에서 나를 덮쳤고 나는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절벽 아래로 미끄러졌다.

"보레야!"

아이가 나를 부르면서 손을 뻗었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나는 파도의 강한 힘에 이끌려 절벽 아래로 끌어 당겨졌다.
떨어진 이후로 내 몸은 아주 깊은 바다로 내려갔다.
마지막 숨이 붙어있을 때 얼핏 불빛을 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얘!"

목소리가 들렸다.

"얘! 일어나보렴!"

"나는 죽은걸까?"

"얘! 어서 일어나봐!"

재촉하는 소리에 어쩌면 지금까지 모든 것이 꿈이었고 엄마가 나를 깨우고 계신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눈을 반쯤 뜬채 몽롱한 상태로 물었다.

"...엄마?"

하하하하하하하하

간드러지는 웃음소리
여러명이 함께 웃는 웃음소리였다.
집에 있는 건 아닌 게 확실하군.
눈을 완전히 크게 뜨니, 다양한 얼굴들이 나를 보고 있는 게 보였다.

"흠흠.."

대장격이 되어 보이는 누군가가 말했다.

"일어나렴, 주위를 둘러봐, 우리를 봐."

나는 그제서야 몸을 일으키고는 나를 둘러싼 다양한 이들을 자세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얼굴, 몸, 그리고 지느러미가 있었다.
지느러미?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당신들은 누구죠?"

"우리는 인어란다."

확인사살.

"인어요?"

그 순간 조금 어두웠던 방이 환하게 밝혀졌다.
쾌활한 웃음이 방 안을 가득 채운다.

"드디어 알아냈네!"

"드디어 놀랐어!"

"얘 표정 봤니?"

"아하하하하하하하하"

인어들은 무척 쾌활하게 웃어댔다.
나는 여전히 얼떨떨한 기분으로 이들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여기는 어디죠? 아! 맞다. 바다에 빠졌는데 제가 어떻게 살아있는거죠? 아니, 애초에 살아있는 건 맞나요? 오 이런, 죽은 게 분명해요. 아님 꿈을 꾸고 있거나. 인어 같은 게 실제로 있을 리 없잖아요. 그럼 여긴 사후세계인건가?"

"이런. 이런."

다른 인어들보다 조금 더 키가 작은 인어가 엄지와 검지로 내 이마에 손가락을 튕겼다.

"자, 진정하고 들으렴 넌 꿈을 꾸고 있는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야. 지금 너는 현실세계에 있단다. 다만 깊은 바다속에 들어와 있을 뿐이야."

전설 속의 생명체들을 직접 보니 실감이 영 나질 않았다.

"인어가 실존한다고요?"

"그럼. 우리는 수천 년전부터 있어왔어."

"단지 언젠가부터 모습을 들어내지 않았을 뿐이지."

"지금 우린 무언가 거대한 일을 준비중이거든."

"정말 거대한 일이야."

"앞으로는 지금과는 정말로 달라질 거야."

"그게 뭐죠?"

"알려주면 안된다고 하셨는데."

"누가요?"

"누구긴 누구야. 대인어 님이지."

"대인어 님이요? 그 분은 또 누구신데요?"

"우리 인어들을 이끌어주고 계시는 분이야."

"지금은 바다의 대장격인 역할도 하고 계시지."

"그렇군요. 저는 여길 어떻게 오게 된 건가요?"

"우리도 잘은 몰라."

"네가 어떻게 살아있는지 어떻게 여기로 오게 되었는지는 말이야."

"다만 네가 가진 그 목걸이. 물 속 생명체의 정수가 너를 여기로 이끌었어."

"그걸 어떻게 가지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짐작하기로는.."

"정수요?"

인어들은 내 질문을 무시하고 계속 말했다.

"누군가가 육지에서 잠깐 뱃사람 홀려서 장난친 산물이 너일 수도 있고
정말 만약의 경우지만...
배신자일지도 모르지."

순간 적막이 흘렀다.

"그럼에도 언니는 끝끝내 그 인간 편을 들었지."

그 인어가 그 말을 하는 순간 인어의 주변으로는 거친 물방울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화가 난 사람이 매우 열을 받아서 콧김을 씩씩거리는 것 같았다.

"결국 대인어 님이 언니를 추방했고.."

"지금쯤 뭐 하고 있으려나?"

"아마 죽었을지도 몰라."

"인어는 추방 당한 후에 묻에서 오래 있으면 거의 사람처럼 되어버리거든."

"본디 우리는 물 속에서 끝없는 젊음을 지니고 태어나 영생하는 존재인데,
묻으로 올라가버리면 숨을 헐떡거리면서 쉬다가 결국에 점점 말라서 죽어버려."

"사람들은 그렇게 살다가 그냥 가잖니?"

"꺄르르르르"

재밌다는 듯이 다른 인어들이 말했다.

"저.. 사람들이 그렇게 허무하게 가는 건 아니에요. 사람들도 저마다 살면서 추억을 쌓고 다른 사람과 함께하면서 어떤 말할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을 만들어요.
저는 인어들의 삶이 어떤지는 아직 잘 모르지만,
사람의 삶이 그렇게 허무하게, 짧게 이야기할만큼 무가치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호호호호"

"얘가 뭘 아직 잘 모르는구나."

여러 인어들은 깔깔거리면서 저 멀리로 사라졌다.

"나중에 다시 보자!"

"우린 할 일이 있어서 이만."

"잠시만요!"

"어디로 가시는거예요?"

"저도 데려가주세..."

철컥 잠기는 소리가 났다.
잠기는 소리가 아니라 진짜로 묻이 잠겼고 내 힘으로는 열 수가 없었다.
바깥에서 잠기는 문이었다.

나는 다시 바다 속 방에 혼자 남았다.
말이 방이지 감옥이나 다름없지.

한동안 주변이 밝았는데
바다 속에도 태양이 있는건지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구석 자리에 앉아 그냥 가만히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문이 열렸다.

"누구세요?"

"쉿!"

아까 여러 인어들 사이에 있었던 인어 중 한 명이다.

이 인어는 붉은색 지느러미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

"이게 뭐예요?"

"칼이야."

"어서 이걸 가지고 가서 저쪽 방에 있는 대인어 님을 찔러 죽여."

"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와 다른 세상 사람들이 죽고 말아."

"우리 다른 인어들이 가볍게 말하지만 우리는 이미 오랫동안 준비해왔어.
우리는 인간들을 말살할 계획을 짰고 이제 거의 막바지에 다다랐어.
네가 차고 있던 목걸이가 방에 물을 가득 채웠던 거 기억하지?"

"그걸 어떻게..?"

"우린 그런 일종의 매개체를 통해 물의 힘을 다스려서 세상을 보고 또 지배할 수 있어."

"만약에 그런 힘이 온 세상에 퍼진다고 생각해봐."

"너희 인간들은 모두 사라지고 말거야."

"그러니 어서 내 말을 들어.
지금 대인어 님을 죽여야 해."

"그러면 저 멍청한 다른 인어들은 자연스럽게 흩어지게 될거야."

"그걸 왜 제가 해야 하는거죠?"

나는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전설에 대인어 님을 죽일 인간이 바다로 내려와서 대인어 님을 죽인다고 되어 있어.
그리고 다시 평화가 오게 된다고..
사람 뿐만 아니라 인어들에게까지도 말이야."

"모르는 척 했지만 네가 바다 가까이로 왔을 때 인어들은 그걸 물에서 지켜봤고 네가 그 전설의 아이라는 걸 단박에 알아챘기 때문에
이렇게 너를 방에 가둬둔거야.
전설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네가 대인어 님을 죽인다면 전설이 이루어지고 평화가 찾아올거야.
어서 해!"

"드빌라"

그 순간 바깥 복도에서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이 인어의 이름이 드빌라인 모양이었다.

인어는 순간 몸이 굳었다.

인어는 다급하게 칼을 칼집에 넣어 내 주머니에 대충 쑤셔주고는 복도에서 들려오는 부드러운 음성을 따라 나갔다.

어두운 방 안의 문에 난 조그마한 창문의 빛 사이로 그림자가 한동안 무언가 격렬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듯 어른거렸다.

잠시 후, 붉은 머리의 인어가 돌아왔다.

"대인어 님이 너를 부르셔."

"저를요?"

"그래."

"저는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어떻게 하라니? 기회를 봐서 찔러."

"저희가 나눴던 대화를 대인어 님이 이미 다 듣지 않으셨을까요?"

"그런 아무래도 괜찮아, 기회를 잘 보고 찔러."

어이가 없었다.

"어서 가봐!"

나는 그렇게 드빌라에게 등을 떠밀려 대인어에게 가게 되었다.

"문 밖을 나가서 왼쪽 복도로 꺾어 가면 맨 끝에 있는 방이야."

드빌라가 덧붙였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방으로 한걸음 한걸음 천천히 걸었다.

11화 대인어의 방

복도의 맨 끝에 다다른 나는 문을 발견했다.
문은 오래된 갈색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너무나 오래된 나머지 회색 같이 보일 지경이었다.
쇠로 된 둥근 문고리는 조금 녹이 슬어 있었고 문 전체에는 물풀들이 덮여 있어 이 문이 오래되었다는 느낌을 한층 강화시켜 주었다.

나는 이 오래된 문을 앞에 한번 심호흡을 하고는 문을 벌컥 열었다.

"너는 노크할 줄도 모르니?"

문을 열자마자 아까 복도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가 말했다.

"앗.. 죄송해요."

"다음부터는 조심하렴."

이렇게 말하는 대인어의 목소리에서는 강한 느낌이 들었지만 이상하게 상냥한 느낌도 들었다.
방은 내가 있던 방처럼 어두웠고 여기 저기에 이상한 물건들이 많이 놓여 있었다.
대인어라고 하는 이는 그냥 방을 슥 둘러보았을 때는 보이지 않았다.
오직 목소리만이 어딘가에서 들려올 뿐이었다.
나는 약간 스산한 분위기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꽃길."

"네?"

"꽃길만 걷자?
너희 족속은 꽃이 뒤덮여 있는 길을 걷질 못하는구나?
반세기 전만 해도 그렇게 유약한 족속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떨어진 꽃을 망가뜨리기 싫어, 밟지 않고 걷고자 하는 것이든지
아니면 그냥 걷는 걸 못 하는 족속이 되어버렸구나."

"그게 아니에요.."

"아니니?
보통 저런 종이에는 이루어지지 않을 일을 써놓지 않니?
누구나 바라지만 아득히 멀고 또 고통만이 가득해서 이루어지지 않을 소망을 종이에 쓰고 또 서로에게 전해주는 것을 통해서 서로의 고통을 조금씩 덜지.
이제 들어오렴."

대인어가 이 말을 마치자 갑자기 왼쪽 구석에 있던 초록색 커튼이 스르르 거치면서 작은 방이 나타났다.
그 방은 꼭 동굴 같았다. 서너명이 앉을 정도의 작은 공간이었다. 방의 가운데에는 아까 보았던 문과 같이 오래된 나무로 된 둥근 탁자가 있었고 주위로는 등받이가 없는 의자가 여러 개 있었다. 그 의자 중 하나에 대인어가 앉아 있었다.
대인어는 다른 인어들처럼 다리 대신 지느러미가 있었고 상당히 날카로운 인상을 하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처음 보았을 때는 좀 무서워보였지만 보면 볼수록 따뜻해보이는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탁자 위에는 수정구슬이 올라가 있었는데 대인어는 이 구슬에서 조금도 눈을 때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아까부터 이 구슬로 뭔가를 보면서 계속 말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누군가 나와 같은 이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야.
나는 유일한 나이기 때문에 외로워.
내 고통을 덜어줄 이는 없지.
다른 인어들은 나를 대인어라고 부르지만
엄밀히 말하면 나는 저들과도 다른 족속이야.
그저 지금 내가 여기 있는 이유는
저들이 필요해서일 뿐.
뭐 그런 것 치고는 좀 오래 있었지.
그래도 난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알고 그걸 반드시 이루어내고 말거다."

그제서야 대인어는 나에게 눈을 돌렸다.

"어서오렴." 대인어는 상냥한 눈웃음과 함께 인사를 했다.

"저를 왜 부르신거죠?" 나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잘 지내고 있나 해서 불러봤어. 딱히 큰 이유는 없단다. 혹시 너는 나에게 궁금한 점 있니? 지금 표정을 보니 약간 무서워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궁금한 점도 많아보이는구나. 어떤 것이든 물어봐도 좋아.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구나."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 입을 땠다.

"저는 어떻게 여기로 올 수 있게 된거죠?"

"간단해. 너도 알지 않니? 목걸일 태양에 비췄잖아. 계속 네 할머니의 목걸이에 대한 걸 알고 싶어 했고. 여기가 그 끝이야. 답을 찾으려고 했고 그 답이 너를 여기로 이끌었다."

"저희 할머닐 아세요?"

"그럼 잘 알지. 너희 할머니가 내 친구였단다."

"네??"

"그냥 친구도 아니었어. 너희 할머니는 우리 종족이었거든. 나랑 같은 대인어였단 말이다. 이 세상이 처음 생겼을 때. 아직 호수나 바다가 없던 때. 우리는 그 시절을 함께 했던 친구였단 말이야."

"우린 참 친했어. 슬프게도 그 친구가 나를 버리고 인간에게로 가버렸지만 말야. 그것도 하필 다른 종족도 아니고 우리 종족을 아주 끔찍하게 죽인 인간이란 종족에게 말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어..."

"그런데, 오늘 그 인간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손인 너를 이렇게 보게 되다니. 참 신기하구나. 이런 식으로라도 다시 내 곁으로 돌아올 줄이야."

"할머니는 어릴 적이면 상어 호수에 대한 이야길 해주셨어요. 설마 그게 이런 이야기일 줄이야.."

"그러셨니?"

"흠 그럼 내 이야기도 한번 들어볼래?
이쪽이 훨씬 명확하고 더 재밌을거다.
이 이야기는 인간 입장이 아니라 우리 종족의 입장이니까."

"우리는 본디 하늘에 있었어."

대인어는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래. 우리가 바로 고대 사람들이 불러왔던 바로 그 상어다.
그렇지만 우리가 지금 익히 세상에서 상어라 불리는 물고기와 우리는 엄연히 다른 족속이야.
과거 사람들이 우리를 나쁘게 부른 그 명칭이 그 물고기에게로 옮겨 붙여진 거지.
어쩜 근데 그런 물고기한테 우리 족속의 이름을 붙일 수가 있지?
대체 얼마나 우릴 우습게 본거야?

대인어는 그러면서 잠시 부르르 떨었다.

그럼 이야기를 계속 하도록 하지.
우리는 하늘에 있었어.
하늘은 우리들의 세계였고 땅은 인간들의 세계였지.
그런데 인간들의 탐욕은 끝이 없었어.
그들은 하늘에 닿는 건물들을 여러개 쌓고 불을 피워 우리 하늘을 오염시켰지.
우린 그래서 결심했어.
그들이 점차 하늘을 점령해나가고자 한다면, 우리도 땅으로 내려가겠다고.
그래서 우린 땅에 물을 부었어.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갔지.
그렇다고 인간들을 괴롭힌 건 아니었어.
그저 그들이 하늘을 차지하는만큼, 우리도 땅을 조금씩 차지하겠다는 거였지.
우리는 한동안 서로 우호적이게 지냈어. 우리는 우리가 가진 놀라운 힘으로 인간들의 삶을 윤택하게 해줬어.
그런데 그들의 탐욕은 끝이 없더구나.
그들은 우리를 죽이고 그걸 모른채하며 방관했어. 비밀인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공공연하게 죽였지.
우리 종족들은 분노했어.
그럼에도 아직 아무도 나서진 않았지.
우린 그때 너무 순수했어.
우리가 조금 더 잘하면 이런 것들이 아직 옛날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인간들은 생각한 것보다 더 교활하더구나.
어느샌가 우리는 인간을 죽였다는 누명을 썼지.
맹세하건데 그때 우리는 단 한 명의 인간도 죽이지 않았어.
그들은 근데 어느 순간 우리가 아이를 죽였다고 하더군.
그 선동질에 분노한 다른 인간들은 우리를 이제 대놓고 학살하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대인어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을 조용히 있다 다시 말을 이어갔다.

우리는 결국 전쟁을 일으키기로 결정했단다.
이 죽음을 어떻게 보상하겠냐고.
우리도 똑같이 해야 한다고 말이야.
우린 우리가 가진 물의 힘을 이용해서 인간들을 아주 깔끔하게 처리할 수가 있었어.
그런데, 어떤 미련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진 한 아이가 여기에 동의하지 않았어.
인간을 죽이고 싶어하지 않더구나. 오히려 그들의 편을 들었어.
우리는 본디 모두가 동의해야 움직이는데, 그 아이만 그러지 않았으니 잠시 계획을 보류했지.
근데 그 배신자는 우리가 잠든 사이 우리의 힘을 봉인해버렸어.
힘을 잃어버린 우리는 낙담했지.
인간들은 그동안 우리를 더 많이 잡았고.
화가 난 우리는 결국 그 아이를 땅으로 추방했어.
그 아이가 바로 네 할머니다.
동족을 배신하고 인간의 편을 든 배신자.
난 그렇지만 그 아이를 사랑했어.
그 아이는 내 라이벌이자. 친구였지.
그 아이가 추방당하자 우리의 봉인도 풀렸지.
아마 인간들은 놀랐을거야.
물 속의 생명체가 죽지 않은채로 올라왔고 또 그들과 같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 아이는 그렇게 인간 편을 들더니 결국 영생을 저버리고 인간의 모습을 한채로 거기서 살아가는 걸 택했지.
내 얘긴 일단 여기까지야.

이야기가 끝나자 나는 지금껏 궁금했던 걸 물었다.

"이 목걸인 대체 뭔가요?
목걸일 걸고 있으면 이상한 일이 일어나곤 했어요."

"그건 대인어 종족의 정수야.
물의 종족이라면 사실 누구나 하나씩 가지고 있지
그중 대인어 종족이 가진 정수는 그 어떤 생물이 가진 것보다 강한 힘을 지니고 있어."

"여러개의 정수가 합쳐지면 세상을 멸망시킬만한 커다란 힘을 낸단다.
정수의 주인이 허락한다면 말이야.
만약 허락하지 않는 경우 그 목걸이의 주인이 죽으면 그 힘을 다른 이가 가질 수도 있어.
인간의 경우 지성이.
물의 종족의 경우 힘이 더해지게 되지."

같은 대인어에겐 고동색으로
평범한 인간에겐 파란색으로 보인단다.

"그리고.."

대인어는 조금 뜸을 들였다.

"누군가가 너를 노리고 있다면 빨간색으로 변하지."

나는 무심결에 목걸이를 내려다보았다.
목걸이는 새빨갛게 변해있었다.

"미안하다. 오늘 너는 여기서 죽어줘야겠어."

그녀는 칼을 꺼내들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한참을 지나도 조용했다.
대인어는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거지?"

후우...

대인어는 칼을 떨어뜨렸다.

쨍그랑

"네 눈을 본 순간 도무지 찌를 수가 없더구나.
네 눈은 너무 그 아이와 똑같아...
나도 이렇게 마음이 약해져서야.."

그 순간, 내 주머니에 있던 칼이 갑자기 그녀를 찔렀다.
아까 전에 드빌라라는 인어가 내 호주머니에 넣었던 그 칼이었다.

"너..."

대인어는 짧은 신음 소리를 내고는 쓰러졌다.

"축하해. 네가 전설을 이뤘어."

눈을 들어 보니 언제 들어왔는지 드빌라라는 인어가 내 앞에 서 있었다.

"대체 무슨 짓이예요?"

"어머, 무슨 짓이라니. 내가 찌르라고 했잖아. 이 이는 널 죽이려고 했다고. 처음부터 그랬지.
너를 죽이는 걸 통해서 그 힘을 자기가 가지고 온 세상을 다 물로 채우려고 했어.
내가 말했잖아 인간을 말살시키려고 했다고. 그리고 그건 처음도 아니야."

"그게 사실이예요?"

대인어는 아직 가쁜 숨을 내쉬며 조금 움직이고 있었다. 말을 하는 것은 힘들어 보였다.

"그럼 사실이고 말고."

드빌라가 대신 대답했다.

"왜 이 이야기들을 너는 학교에서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고, 또 전설로만 전해져 내려오는지 알려줄까?"

"그건 바로 이미 전세계가 한번 멸망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야. 그 전까지 쓰였던 모든 역사책은 다 물 속으로 가라앉았지."

"그리고 그 모든 건 이 나쁜 인어가 주도 했었다는 말씀."

대인어는 아직도 숨을 가쁘게 쉬었다.

"마지막 말을 들어볼까?"

드빌라는 칼을 다시 한번 움켜쥐고는 대인어를 가격했다.

"잠깐만요."

내가 말했다.

"한번 더 기회를 줄 수 없을까요?"

"뭐?"

"너 정말 멍청한 아이구나."

"아니예요. 이 분은 저를 죽이려다가 망설이셨단 말이예요."

"내가 칼을 조종해 찌르지 않았다면 분명히 너를 찔렀을 거야."

"그래도 망설이셨잖아요. 뭔가 다른 생각이 있으셨던 걸거예요.
생각이 다른 것치고 아직 행동도 하지 않은 사람을 그냥 죽여버리는 건, 너무 무모하지 않나요?"

"세상에 너 정말 답답한 아이구나.
너를 죽일 뻔 했다고, 그리고 세상을 멸망시키려고 한 사람이고.
아니, 이미 한번 멸망시켰어.
넌 뭣 때문에 이런 이를 믿는거냐?"

"그냥 이 분한테서는 어떤 딜레마가 느껴져졌어요.
우리와 생각이 다르다고 그냥 죽여버리면 우리가 예전 인간들과 뭐가 다른가요?"

"적어도 지금은 치료해주고 재판 같은 거라도 해서 변론이라도 들어봐요."

"그래, 좋아. 대신 힘을 낼 수 있는 정수는 모두 뺏어야 한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어서 나에게 줘."

그 순간 대인어는 필사적으로 나를 꼭 붙잡았다.
뭔가 안된다는 신호인 것 같았다.

"어서!"

드빌라가 말했다.

순간 나는 드빌라의 뒤를 보았다.
무장한 인어들이 줄을 서 있었다.

"드빌라?"

"뭐야?"

"저기 뒤에 서 있는 저들은 뭐죠?"

"아, 저들은 말이야..."

드빌라는 뜸을 들였다.

그런데 갑자기 돌변하여 내 목걸이를 낚아채려고 하는 게 아닌가.

"왜 그래요?!"

"젠장. 어서 그 목걸일 내놔."

드빌라는 강압적인 어투로 말했다.

"내가 너를 죽이지 않게 해다오. 어서 목걸일 내놔."

드빌라는 그러면서 칼을 내쪽으로 가져다 댔다.

"얘들아, 대인어의 정수를 회수하렴."

무장한 인어들이 대인어의 정수를 가지고 나갔다.

"나는 그저 균형을 맞추려는 것 뿐이란다. 저 이에게 들었겠지? 하늘을 차지한만큼 땅을 차지했다고 말이야. 그때의 균형은 그런거였지."

"지금은 그 균형이 엄청나게 깨졌어. 우리가 그들에게 죽임을 당하는동안, 우리는 그만큼 죽이질 못했단 말이야."

"나는 그저 균형을 위해 집행자가 되려고 하는 거야. 공정함과 올바름. 그것이 온세상을 다시 평화롭게 해줄 유일한 것이야."

"이제 목걸일 어서 내놔."

"싫어요. 당신네들이 공정할 거란 건 어떻게 믿죠?"

"그럼 어쩔 수 없구나."

그녀는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고 그에 맞춰 그녀의 검이 나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 내 목걸이에서 큰 빛과 소리가 났다.

"잠깐.. 이건 또 뭐야. 이 애는 지금은 정수를 사용할 수 없을텐데?!"

빛과 소리는 점점 더 커져서 드빌라의 칼을 튕겨져 나가게 했고. 그녀를 쓰러지게 만들었다.
그녀가 쓰러지자 그녀의 추종자들은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졌다.
그녀가 쓰러지자 어디선가 결박이 나와 그녀를 꽁꽁 묶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지만, 일단은 쓰러져있는 대인어에게로 다가갔다.

"괜찮으세요?"

대인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선반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선반에는 작은 병 하나가 있었다.
나는 대인어에게 그 병을 얼른 가져다 주었다.

대인어는 병에 들은 액체를 마시고는 기력을 좀 회복한 것처럼 보였다.

"살려줘서 고맙다."

"그전에 확실히 할게 있어요."

"정말 지구에 대홍수를 일으켜서 모든 인간을 죽였나요?"

"그래. 하지만 내가 전적으로 주도한 일은 아니야. 예전 아직 우리의 원로들이 살아 있을 때 그들과 함께 일으킨 것이지. 하나의 정수로는 그렇게 큰 홍수를 일으킬 수 없어. 그럼에도 나도 그 당시에는 동의했기 때문에 내가 죽인 거라고 말해도 되겠구나.."

"하지만 모든 인간을 죽이진 않았어. 나와 몇몇이 모여, 인간들에게 홍수에 대한 경고를 내렸거든. 그들이 살 방도를 마련해주었어."

"그런데 대부분의 인간들은 듣질 않더구나. 한 지혜로운 인간만이 자신의 가족들을 모아 은신처를 만들었어. 그들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았지."

"지금은 후회하고 있어. 그렇게 끔찍한 결정을 내렸던 우리들에 대해서 말이야."

"그리고 다시는 그런 일을 벌이지 않기로 맹세했지."

"드빌라가 말한 건 거짓말이야. 나는 바다의 모든 이를 모아서 대화를 나누고는 인간의 대표를 만나려고 했어.
우리는 지난 수 천년동안 교류가 없었거든.
서로 협약을 다시 맺게 되길 바랬어."

"그럼 저는 왜 죽이려고 하신 건가요?"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드빌라가 널 찔렀을거야."

"네?"

"아까 목걸이가 붉은 색으로 변했지?"

"네."

"너는 너를 노린 게 나라고 생각했겠지만, 실은 더 멀리서 드빌라가 네가 가진 목걸이, 정수의 힘을 흡수하기 위해 널 찌르려고 칼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어.
드빌라는 아주 영악한 자야.
우릴 뒤에서 몰래 지켜보다가 상황이 내가 너를 죽일 것 같이 되자, 너를 처리하는 것보다는 아군으로 만들고 나를 먼저 처리하는 게 낫다고 판단하고는 순간적으로 나를 너 대신 찌른거란다.
너도 결국 반은 대인어의 피가 흐르는 족속이잖니.
그러니 쓸모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거야.
물론 나는 그녀가 그렇게 할거라는 걸 알았고.
평상시에는 나는 항상 결계를 치고 혼자 있기 때문에 나를 함부로 죽이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그녀가 노릴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내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있을 때인데
지금까지 그런 기회가 없었으니 이번이 적기라고 생각했던거야.
그녀가 나를 찌르고 방심하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널 여기로 부른 거였단다.
수억 년을 살다보면 잔꾀가 늘어나는 것 같아.
그녀는 무서운 인어야. 올바름과 대의를 위해서는 작은 생명쯤은 아주 가볍게 생각하지.
대홍수를 통해 배운 게 아무것도 없어."

"우리는 홍수를 일으키고 나서야 그게 얼마나 끔찍한 일이었는지를 깨달았어.
물에 잠긴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통곡하는 소리가 한동안은 귀를 엄청나게 멤돌았지.
홍수가 끝나고 우리 대인어들은 대부분 자살했어.
그들은 세상을 멸망시킨 죄책감으로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을 잃어버렸지.
오직 나만이 홀로 남아, 인간들에게 사죄하고 다시 새로운 세대를 만들 것을 기다리고 있었어."

"그러셨군요.."

"내 소개가 늦었구나. 내 이름은 실라. 실라 가보테야."

"이제 임무가 끝났으니 작별할 시간이다.
네가 내 이름을 알고 나를 기억하는 한 우린 다시 만날 수 있을거야.
나는 그동안 다른 아이들을 모아서 연합하고 인간들과 다시 교류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을게."

"잠시만요!"

"행운이 있기를."

대인어는 나를 물거품을 일으켜 바다 위로 올려주었다.

그렇게 이야기는 끝났다.

나는 내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들이 어떤 모습이든 간에 나는 그들과 함께 살아갈 것이다.

나는 할아버지의 아이디어 공책에 그렇게 쓰고는 겉표지를 덮었다.

오전 8시 42분.
나는 이제 잠들지 않는다.
첫 수업은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갔고 곧 학교종이 울렸다.

쉬는 시간.
그 애가 다른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무언가 결심한듯 주먹을 불끈 쥐고는 그 아이에게 한걸음 한걸음 다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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