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 영화관

카테고리 없음 2024.10.27 댓글 유니밧

복고 열풍이 불고 있었다. 내가 어릴 적부터 자주 다니던 거리는 그 열풍에 따라 거리의 느낌을 80년대의 것으로 꾸몄다. 그 거리는 2000년대 초반에 생겨서 이미 지금 시점에서도 레트로 했지만, 시에서는 예산을 쏟아부어서 그곳을 정말 옛 느낌이 나는 거리로 만들려고 한 것 같았다.

나로서는 아쉬운 일이었다. 나 역시 복고풍을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이런 식으로 정든 내 옛거리가 복고풍으로 바뀌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거리는 복고풍이 되었을지언정, 새롭게 공사를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오래된 느낌을 주려는 듯한 시도는 묘한 현대적인 감각을 주어서 나에게는 더 이질감을 들게 만들었다.

자주 보던 익숙했던 많은 것들이 철거되거나 바뀌어갔다. 익숙한 촌스러운 간판에서 세련된 네온사인으로, 각종 벽에 붙은 없어보였던 로고들은 어쩐지 힙해보이는 80년대 로고로 바뀌어갔다.

바뀐 거리는 인기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sns에 사진을 찍어 올리려고 그 거리를 찾았다. 그전까지만 해도 그 거리에 방문하곤 하던 소수의 나같은 사람을 제외하고는 거의 버려져 있던 곳이었기 때문에 거리로선 잘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레트로풍 거리를 걸어다니면서, 예전에 내가 기억하던 그 후줄근하던 거리의 남은 파편 조각을 찾아다녔다. 한번은 거리의 맨 끝 구석에서 공사를 하고 아직 치우지 않은 분식집 간판 하나를 발견했는데, 그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앞에서 한참동안 사진을 찍었다.

그 전단지를 보게 된 것은 간판을 보고 다시 세련된 복고풍의 거리를 지나 집으로 돌아가고 있을 때였다. 발길에 전단지 하나가 채였다. 번화가를 걸어다니다보면 성인나이트클럽 전단지가 발에 걸리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 전단지는 걸을 때마다 이상하게 내 발길에 계속 채였고, 나는 그걸 내 앞에서 치워버리기 위해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회색 신발자국이 잔뜩 찍힌 처음 본 그 전단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마법 영화관

당신이 머릿속으로 생각한 영화를 정확하게 맞춰서 틀어드립니다.
당신이 영화관의 주인공입니다.
쉬었다 가세요!

전단지를 들고 오시면 15% 할인

00거리 00번 가게

피식 하고 웃음이 났다. 너무 조악한 홍보 문구가 아닌가. sns로 세련되게 홍보하는 이런 시대에, 이런 전단지라니. 전단지의 00거리 00번 가게라는 글귀 아래에는 약도까지 그려놨다. 게다가 이 전단지는 디자인도 누가 했는지 무척 촌스러웠다. 아니, 세련된 촌스러움이 아니라, 마치 초등학생이 ppt를 만든 듯한 느낌의 정제되지 않은 그런 촌스러움이었다고나 할까.

나는 집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전단지는 이제 바람에 날려 저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뒤돌아서 그 전단지를 필사적으로 잡으려고 하고 있었다. 그렇게 그냥 지나다닐 때는 발길에 채이던 전단지가 막상 잡으려고 하니까 쉽게 잡히지가 않았다. 잡으려고 하면 날아가고 잡으려고 하면 또 날아가는 것이 꼭 누가 전단지 끝에 실을 달아놓고 나를 조련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그 전단지의 끄트머리를 발로 밟아서 날아가지 못하게 했다. 전단지는 잡힌 게 억울한지 아직도 바람을 맞으며 펄럭거렸다. 전단지를 따라 얼마나 온건지, 80년대 거리는 사라지고 익숙하지 않은 골목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그 영화관이 있었다. 80년대 풍이 아닌, 진짜 촌스럽게 오래된 영화관. 심지어 이 영화관 간판은 그나마 2000년대 와서 리뉴얼 한 것인지 어중간하게 촌스러웠다. 어릴 적 종종 이런 느낌의 영화관을 다니긴 했는데 바쁘다보니 영화볼 시간도 없었네. 생각해보니, 영화관이 있는 것도 신기했다. 대부분 영화관은 2000년대 초반을 끝으로 전부 대형 스크린에 밀려 사라졌을텐데, 이 영화관은 아직 운영이 되고 있으니..

안으로 들어가자, 한 사람이 있었다. 뿔테 안경을 쓴 점원 한 명. 내가 왔는데도 본체만체하며 풍선껌을 불고 있었다. 내가 데스크 테이블을 두 번 두들기자, 점원은 말 없이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 위쪽에는 궁서체로 상영관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니, 이렇게 그냥 들여보내준다고?

영화관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슴푸레한 노란색 간접 조명과 거기에 얼핏 비치는 주황색의 낡은 의자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영화관이라고 하기에도 뭣하게 좁고 조악한 시설에 코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더 어이가 없었던 것은 생각보다 의자가 편했고.. 아니 내가 거길 생각보다 편하게 느꼈다는 것이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 조명이 꺼지고 문득 영화가 시작되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전단지에 있던 '당신이 머릿속으로 생각한 영화를 정확하게 맞춰서 틀어드립니다.'라는 문구를 믿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아니었다.
내가 생판 처음 보는 영화였고, 그다지 좋아하는 장르의 영화도 아니었다.
이게 뭐지.. 싶으면서도 나는 줄곧 거기 앉아서 그 영화를 봤다.

영화는 사랑 이야기였는데, 전체적인 분위기를 보니까 그냥 뻔한 얘기일 것 같았다. 한참동안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알콩달콩 사랑하는 장면이 나오다가 이후에 헤어지는 그런 장면이 이어졌다.
아, 이제 갈등 부분이군.. 하면서 또 어떤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재결합을 시킬런지 지켜보려고 했다.
그런데 영화는 그냥 그렇게 끝이 났다.
남자는 평생을 그리워하면서 나이가 들었고, 여자는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스태프롤도 없이 영화관의 조명이 다시 켜졌고, 그냥 그렇게 끝이났다.
나는 그런데 나도 모르게 영화를 꽤 몰입해서 봤던 모양이다. 내 자리 옆쪽에 언제부터 앉아있었는지모를 한 사람이 더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던 것을 보면 말이다.

누구시죠..?

이 영화관의 주인일세.
그래, 자네는 아주 오래 버텼구만.

무슨 말씀이신지..

그 사람은 내 쪽을 조금 보면서 따스하게 웃었다.
아, 그제서야 차츰차츰 깨달았다.

나는 레트로풍 거리가 싫었다. 바뀌기 전의 그 거리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걸어 다녔던 거리였다. 새로운 거리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을 밀어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어릴 적의 행복과 관련되어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신경 쓸 것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나는 언젠가부터 버티고 있었다. 어른이라면 능채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다들 그렇게 사니까. 스스로 책임져야 할 나이라 생각하며 그렇게 버텨온 것이다.
하지만 그 거리가 사라졌을 때는 정말 슬펐다. 마음 속에 간직한 어린 시절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그래서 더 버티려고만 했던 것 같다.
나는 그 영화가 내 현실임을 깨달았다.

그래, 많이 그리울테지. 하지만 영화에는 끝이 있기 마련이네.
출구는 저쪽이네.
우리 영화관은 입구와 출구가 달라서 말이지.

그가 그렇게 안내해준다.

하지만 지금 당장 돌아가고 싶지 않다면 좀 더 여기 머물러 있어도 된다네.
그리고 나중에 또 오게.

그렇게 말하고 그는 먼저 출구로 나섰다.
나는 한참을 그곳에 더 앉아 있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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