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불어오는 곳

카테고리 없음 2024.10.26 댓글 유니밧

그런 곳이 있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곳.
겨울이여도 그곳은 언제나 서늘한 바람이 아니라,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곤 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곳은 언제나 시원했다.
그곳은 언덕이었다. 야트막한 언덕의 아래로는 약간의 모레톱과 맞닿아 있는 커다란 강이 있었다.
밤이 되면 하늘은 어둡고 푸른 빛에 별들로 수놓아졌으며 언덕은 반딧불이들이 저마다 소리를 내곤 랬다.
그날도 그랬다. 모두가 잠든 밤, 반딧불이들은 언덕에 누워 찌르르거리고 별들은 하늘을 수놓아 반짝거렸으며 강은 작은 입김을 내쉬며 잠잠했다. 그럴 때면 그곳을 늘 조용히 방문하는 한 소녀가 있었다.
그리고 그 소녀를 지켜보는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이른 아침에 강의 야트막한 곳에다가 통발을 넣어놓고는 저녁 쯤이 되어서 가져가곤 했다.
통발 안에는 가재나 작은 피라미 같은 것들이 잡히곤 했다.
소년이 소녀를 처음 발견한 그 날은 하루종일 읍내에 나가 돈 내고 돈 먹기 게임을 하느라 저녁에 통발을 살펴보는 것을 잊어버린 날이었다. 소년은 돈을 다 잃어버렸고,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었는데, 마침 통발을 살피지 않았다는 것이 생각났던 것이었다.
소년은 통발에 뭐 하나라도 걸려 있는 것을 보면, 오늘 하루 다 잃은 돈의 아쉬움이 조금은 위로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년은 그렇게 통발을 찾으러 갔다. 어두워져서 하늘은 별들이 보였다.
소년은 통발의 자리를 이미 수백번은 더 가봤기에 굳이 표시를 해두지 않아도 어디인지를 지레짐작하여 꺼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날은.. 허탕이었다. 피레미 한 마리 들어 있지 않은 채로 텅빈 통발을 모레톱에 제 몸과 함께 던지며 소년은 한숨을 쉬었다.
강의 숨소리를 들으며 얼마나 누워 있었던지..
소년이 집에 가려고 일어나던 찰나, 저쪽에 유난히 많은 반딧불이가 있는 언덕의 영역이 보였다. 옳커니, 저것들이라도 잡아가야겠다. 소년은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거기서 소년은 소녀를 발견했던 것이다.
소녀는 언덕의 가장 높은 곳에 누워 눈을 감은채로 조용히 숨을 쉬고 있었다.
소년은 어째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소녀를 보자마자 황급히 다시 모래톱쪽의 덤불로 내려가 몸을 숨겼다.
소년은 그러고도 소녀가 거기 누워 있는 것을 한참동안 지켜보았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얼마나 지나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지켜보았다.
오직 보이는 것은 소녀와 언덕, 반딧불이, 별이 수놓은 검은 하늘 뿐.
그곳은 그저 대지 아래에 그 둘만이 있을 뿐.
바람이 불어왔다.
소년은 그런 곳에서 곧 잘도 잠들었는데, 일어났을 때는 좀 으실으실 추웠고, 언덕 쪽의 소녀도 사라져 있었다.
소년은 그 길로 집으로 걸어왔다.
다음날, 소년은 또다시 밤에 언덕으로 갔다. 그리고 덤불 속에 몸을 숨겼다.
소녀는 어제와 같은 그 자리에 누워 있었다.
소녀는 다시 어제와 같이 그저 누워 있는 것이었다.
마치 대지와 하나가 된 마냥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
소년은 소녀가 다시 일어나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또 잠이 들고 말았고, 일어나자 소녀는 다시 사라져 있었다.
다음날, 소년은 이번에는 저녁에 언덕을 갔다. 소녀는 거기에 없었다.
소년은 일찍이 덤불에 몸을 숨기고 소녀를 기다렸다. 소녀가 오는 것을 보고 싶었다.
지금껏 소녀가 한번도 걸어오는 모습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날 한참을 기다려도 소녀는 오지 않았다. 소년은 자지 않고 새벽까지 기다렸다.
하지만 소녀는 오지 않았다.
그 다음날, 그 다음날, 또 다음날에도 소년은 같은 일을 반복했다.
하지만 소녀는 오지 않았다.
소년은 그 길로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왔다.
그리고 소년은 다시 호수에서 소녀를 기다리지 않았다.

소녀는 늘 그 언덕을 좋아했다.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다. 낮이면 늘 여러 사람에게 시달리곤 했던 그 소녀는 혼자만의 이 장소를 좋아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덤불 뒤에서 자꾸 부스럭대는 소리다 들리더니, 누군가 거기 있다는 게 느껴졌다.
소녀는 소년을 발견했다.
아니, 사실 소년이 너무 티나게 지켜보고 있어서 전혀 두렵지도 않았다.
그냥 어린애 한 명이 거기 있을 뿐이란 생각.
하지만 혼자만의 공간이 방해받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저 아이도 이런 짓을 계속 하지는 못할 터, 자신이 하는 일이라곤 그저 누워만 있는 것에 불과하며 그냥 소년이 자신이 가만히 있으면 흥미를 잃고 지레 먼저 사라질거라고 생각했다.
웃기는 소년이었다. 꾸벅꾸벅 조는 것이 보였다.
그럼에도 소년은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를 지켰다.
소녀는 이제 경쟁심이 들었다.
그래, 누가 먼저 여길 뜨나 보자.
소녀는 이제 언덕에서 홀로 유지하던 내면의 평화가 다 깨졌지만 애써 눈을 꼭 감고 가만히 있는 척을 했다. 하지만 실은 그러면서 가끔씩 소년이 갔는지 어쨌는지를 보고 있었다.
풀썩 하는 소리와 함께 소년이 덤불에 고꾸라져 잠이 든 것이 보였다.
소녀는 코웃음을 치며 일어났다.
내가 이겼어!
아니 정말 이겼을까?
어쩐지 승부가 제대로 끝나지 않은 느낌이었다.
소녀는 소년이 있는 풀숲으로 다가가서는 소년을 한번 슥 곁눈질로 보았다.
그러고는 집으로 유유히 돌아갔다.

소녀는 감기에 걸렸다.
매일 가던 언덕에 사흘 내내 가지 못했다.
소녀는 소년이 떠올랐다.
그 애를 이겨야 했다.
소녀는 감기가 낫자마자 다시 언덕을 찾아갔다.
저녁 시간대였다.
하지만 소년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는 언덕에 나타나지 않았다.
소녀는 혼자만의 평온을 되찾았지만, 가끔씩 그 소년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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